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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하여

by 코코맘
어제 퇴근길에 차의 뒷유리가 약간 흐려져 있었다. 좀 더 깨끗한 시야를 위해 닦아내고 싶었는데, 순간 ‘air/water nozzle 버튼을 길게 눌러’ 뒷유리를 ‘클렌징’할 뻔했다.


(* 위/대장내시경 시에 공기를 나오게 하는 버튼을 길게 누르면 내시경 카메라가 달린 앞부분에서 물이 나오며 카메라의 렌즈가 세척되고 시야가 좀 더 깨끗해진다.)



순간 ‘어, 나 요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나 봐? 좀 직업병 모먼트인데?’라는 생각이 들며 혼자 재미있었다. 괜히 신나서는 막히는 퇴근길을 즐겁게 운전했다.


요즘 병원에서 열심히 진료하고, 열심히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검사를 수행하고 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치고 의미를 잃고, 또 해결되지 않는 가족 문제로 고민하고 버텨냈었다.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로 번뇌하다 보니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고 ‘돈’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비관론에서 비롯된 물질만능주의가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 어느 순간부터는 운동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이후 수영 강습에 충분히 자주 가지 못하게 하는 이 ‘일’이라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전의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만나서는, ‘아, 나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운동을 줄이더라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또는 ‘아, 나도 물려받을 돈이 N만큼만 있으면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할 텐데.’와 같은 비관 또는 자조로 흘러가더라. 어느 순간에는 또 일로 피곤해하는 내 몸과, 내시경 검사 이후 아픈 손을 바라보며 자기 연민으로 흐르기도 했고.


연휴 동안 잘 쉬면서 내 생각의 영점이 잘 맞춰져서일까? 어제저녁에 보았던 케이스에 대한 흥미 때문인가? 어제 점심시간에 갑자기 들었던, 다시 논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가? 헬스 개인운동을 가지 못하는 것, PT 수업을 더 자주 하지 못하는 것, 수영 강습에 자주 결석하게 되어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아쉽지만 이상하게 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집에서의 자아, 헬스장에서의 자아, 수영장에서의 자아 외에 일터에서의 자아가 있어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의 positive feedback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감정은 사실 무너지기도 쉬워서 조금은 염려가 된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과 느낌 자체가 귀하다는 걸 알기에, 언젠가는 다시 보고 부끄러울지도 모르는 글이지만 조심스레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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