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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호랭이 Nov 29. 2022

나의 꼬마 요리사

아이의 말을 수집하고 기록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그 마음이 지워질 것 같아 급하게 남겨보는 아이의 말 수집 일기




오늘은 또 뭘 먹나?

냉장고를 뒤적뒤적하다 눈에 띈 냉동오징어 2마리


"봄아 우리 오늘 저녁에 오징어 해 먹을까?" 하니

"응! 좋아!" 하고 아이가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온다.


오징어를 해동하려는데 아이가 거들겠다고 나선다.

"봄이가 씻을 거야!!"


후... 아들아 제발 그것만은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이는 그저 엄마 도와주고 싶은 마음반, 오징어 주물럭 대는 재미 반이겠지만

아이가 한바탕 휩쓸고 간 부엌은 온통 물바다가 될 것이 뻔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하겠다고 말려보지만

이미 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아이는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침 몸도 썩 좋지 않고

계속하겠다고 보채는 아이에게 바짝 날이선 한마디가 날아가고 말았다.


"엄마가 기다리랬지. 조금만 있어봐. 너 여기 난리통 만들기 전에 준비해야 해."


좀 심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이미 말은 뱉었고, 냉랭한 분위기가 돌던 때에

나의 냉랭한 말투에 움찔한 아이가 냉장고 문을 열고 까치발을 딛고는 귤 하나를 꺼내온다.


"엄마 행복해지는 귤이야. 이제 화난 눈썹 하지 마세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아이고... 내가 이런 너에게 무슨 말을 한 건가 싶다.

이제 4살짜리 아이에게 눈앞에 당장 하고 싶은것을 참고 기다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자꾸 잊는다.

오히려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가 건넨 행복해지는 귤을 반반 나눠먹고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대로 해봐라 하고는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한참을 주물럭주물럭

싱크대 주변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지만

행복해지는 귤을 먹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실컷 놀다 실증 이난 아이가 이제 다했다며 나를 부른다.

뒷정리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려는데

아이가 또 쓱 나타나서는


"엄마! 엄마가 화난 눈썹 해도 나는 엄마 계속 사랑할 거예요." 한다.


엄마 이제 화 안 났어 봄아.

봄이가 오징어 깨끗하게 씻어줘서 저녁 맛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도 사랑해하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버터 한 스푼 넣고 버섯, 양파, 오징어 달달 볶은 얼렁뚱땅 요리로 오늘 저녁 한 끼도 잘 먹었다.



봄아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아빠도 평생 엄마한테 그런 말 한번 안 하는데 너는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와서 예쁜 말만 하는 거니?

혹시 어린이집 안 가고 엄마 몰래 학원 다니니? ㅎㅎ


늘 엄마인 내가 더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아이에게 차고 넘치게 사랑받는 쪽은 언제나 나이다.

넘치게 사랑받아 행복한 밤이다.

내일은 화난 눈썹 하지 말고 아이 더 많이 안아줘야지.

나의 꼬마요리사님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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