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놀이, 새로운 운동, 새로운 예술….
앞에서 나는 놀이의 본바탕을 ‘몸 놀이’라고 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던 바로 그 놀이. 어린아이는 몸만으로도 잘 논다.
‘신나’는 다섯 살 여자아이다. 아이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신나는 낯가림이 좀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벽을 넘으면 너무 활발해서 저도 놀랄 때가 있어요. 기분이 격해지면 짜증을 내기도 하고, 속마음을 바로 말하기보다 유치원에서 배웠는지, ‘바보, 똥개’ 같은 말을 툭 던지기도 해요. 좋아하는 건 먹을 것, 그리고 신데렐라·심청이 같은 이야기예요.”
만나 보니 정말 그랬다. 밥도 잘 먹고, 잘 놀고, 이야기를 좋아했다. 마땅한 아이 반찬이 없어도 투정하지 않고 잘 먹는다. 아이가 환하게 웃으면 그 둘레가 다 밝아지는 거 같다.
총회 모임 둘째 날 아침, 신나는 엄마 곁에서 일어나, 나한테로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어 하이 파이브! 이렇게 내가 신나와 가까워진 배경에는 전날 저녁 ‘비밀 사건’이 있었다.
그때 신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식탁 아래서 자꾸 발을 꼼지락거렸다. 무심코 내 발과 닿아,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부드러운 발과의 스킨십이라니….
‘어라, 이 녀석은 엄마 뱃속에서 하던 그 몸짓을 아직도 하네!’
이 부분은 지난 4화에 자세히 다루었다.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피 흐름을 좋게 하려고, 또 심장을 도와주기 위해 태아는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한다는 거다.
나도 신나한테 맞추어, 발을 같이 움직였다. 신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더니 식탁 아래를 힐끔 보고는, 내 눈과 마주치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는다. 곧장 나랑 아예 발장난을 했다. 둘만의 비밀스러운 ‘발 놀이’였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드라마 속 연인들이 떠올랐다. 식탁 위에선 시끌벅적 이야기꽃을 피우지만, 식탁 아래에서는 발끝으로만 주고받는 그 둘만의 은밀한 웃음. 신나와 나는 그런 장난을 나누었으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아침을 먹고 다시 아이들과 여러 놀이를 했다. 방석 던지기, 종이접기, 색칠 놀이…. 그러다가 신나가 바닥에 드러눕더니 몸을 동글게 말아 이리저리 구른다.
“신나야, 그게 뭐야?”
“도토리처럼 구르는 거예요!”
'도토리처럼' 몸을 말고 구르다니! 내 머리에 번개가 번쩍! 나도 따라 구르니 그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체 일정 때문에 금세 자리를 옮겨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신나가 했던 ‘도토리 운동’이 자꾸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주 원초적인 운동이 아닐까? 도토리 모양으로 웅크린 자세, 바로 엄마 뱃속 태아의 모습과 닮았다. 태아는 이렇게 웅크린 채 여러 모습으로 움직인다. 태아 발달 단계에 따라, 손 발가락 꼼지락거리기부터 몸을 비틀고, 구르고, 뒤집고…. 산모는 그것을 ‘태동’으로 느낀다.
태아가 하는 운동이란 아이 자신의 건강한 발달이 첫째요, 이어서 엄마 뱃속에서 나오기 위한 사전 운동이라 하겠다. 그 어떤 태아도 수술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분만을 연습하는 과정이리라. 엄마한테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인 자연분만을 아기는 온전히 자기 몫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머리가 먼저 나오게 하려면 스스로 몸을 비틀고, 구르며, 뒤집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어떤 과정인지를 아기는 본능으로 아는 셈이다. 또한 그 앎은 저절로 현실이 되는 게 아니다. 반복 연습이 필수라는 것도 아기는 안다. 그렇다면 태아가 하는 무의식 운동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운동이 아닐까!
또한 아기가 산도를 따라 ‘하늘 문’을 나올 때, 역시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회전하듯이 나온다. 아기 머리에 이어, 어깨 나올 때가 가장 어렵다. 산모는 여러 가지 ‘윤활유’를 내고, 아기는 비좁은 산도를 스스로 잘 빠져나오려고 몸을 돌리며 나온다. 이렇게 해야 마찰이 줄면서 더 쉽게 나온다.
산모가 아기 몸을 돌리는 게 아니다. 아기가 먼저 움직이고, 산모는 아기가 잘 나오도록 돕는다. 분만 예정일을 산모는 ‘대략’ 짚을 수는 있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선택’은 아이가 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자녀 교육의 모든 시작점은 바로 여기랑 맞닿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가 주인이고, 부모나 어른은 아이 성장을 곁에서 돕는 거라고….
아이들 놀이 가운데 동물 흉내 내는 놀이나 운동법은 많다. 요가에서 하는 고양이 자세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네 발로 탄성을 주면서 기는 악어 걸음은 척추 운동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식물한테 영감을 얻은 놀이나 운동법은 거의 없다. 동물은 그 움직임이 눈에 잘 띄지만 식물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은 그저 얼핏 보기에는 제자리에 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도토리 운동을 떠올린 신나가 얼마나 대견한가.
나는 궁금했다. 행여나 다른 누군가가 이 운동을 이미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글을 정리하면서 ‘도토리 운동’에 대해 AI 도움을 받아, 두루 검색해 보았다. 없었다. 도토리 놀이는 많다. 도토리를 가지고 팽이처럼 돌린다거나 구슬처럼 굴리거나 던지는 놀이는 많더라.
그러나 신나처럼 ‘나 스스로 도토리가 되어보는 운동’은 없다. 신나가 도토리 운동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 된다. 이 정도면 나는 창조로 본다. 태아 때 하던 무의식 운동을 의식으로 다시 탄생시킨 것이다. 나와 도토리가 하나 되는 새로운 놀이요, 새로운 운동법이며, 새로운 생존법이다. 이렇게 태아가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앞뒤 과정을 안다면 도토리 운동은 그 어떤 행위 예술보다 위대하고 거룩한 예술이기도 하리라. 놀이이자, 운동이며, 예술이다. 또한 성장이자, 앞날의 꿈이기도 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는 아기 스스로 산도를 나오는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보고 싶다. 또는 현대 무용으로 재해석하여 ‘생명 탄생의 춤’을 추고도 싶다. 태아가 온전하고, 고유한 사람으로 바뀌는, 그 거룩한 과정을…!
신나한테 영감을 받은 김에 내 상상력이 뻗어간다. 그럼, 다른 씨앗은 어떨까? 사진으로 보듯이 상추 씨앗과 당근 씨앗은 도토리 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상추 씨앗: 하늘하늘 갓털이 바람 타고 날아간다. → 두 팔을 펴고 하늘로 폴짝폴짝 뛰어보자. 상추 씨앗이 스스로 살 곳을 찾아, 어미를 훨훨 떠나는 운동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당근 씨앗: 잔털이 송송.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탈 것이다. 물이 있다면 노 젓듯 균형을 잡으며 나아갈 것이다. 짐승을 만나면 털에 붙어 멀리멀리 퍼질 것이다. 그러다가 맞춤한 흙을 만난다면 그 속으로 파고 들리라→ ‘노 젓기 놀이’를 한다면 당근 씨앗을 떠올려보자. 물도, 바람도, 흙도, 동물도, 사람도 다 내 편으로 만들도록 놀아보자.
씨앗마다 그 고유한 모양을 알면 놀이와 운동도 이렇게 끝없이 새로워진다. 또 그렇게 놀다 보면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창조는 또 다른 창조로도 쉽게 이어질 수 있는 법. 더 새로운 놀이를 만들 수도 있고, 관련 노래를 지을 수 있고, 그림책을 만들 수 있고, 동화책을 쓸 수도 있지 않는가. 새로운 안무를 짤 수도 있으리. 그렇게 우리 삶은 창조로 시작하고, 창조로 계속 이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파괴와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도자들에게 이 도토리 운동을 꼭 권하고 싶다. 아니, 전 인류가 함께하고 싶은 운동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이에게서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신나는 단순히 자기 몸을 도토리처럼 굴렸을 뿐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놀이와 운동 그리고 다양한 영감을 얻었다. 나는 이제 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기지개 다음으로 이 도토리 운동을 한다. 이번 임시 유치원은 내게 ‘임시’가 아니라 ‘영원’으로 남을 거 같다.
이 연재 6화에서 나는 창조 놀이를 아이가 가진 본성이라 했는데 신나를 보면서 그 내용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창조 본성은 곧 무의식하고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본성은 의식보다는 무의식과 더 잘 어울리기 마련. 의식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한다면 무의식은 무한 상상이나 모든 꿈이 가능하니까. 신나에게는 그렇게 엄마 뱃속 경험이 무의식을 딛고, 놀이로 드러난 셈이다. 앞으로도 신나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몰입하며, 잘 자라길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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