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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Dec 15. 2021

나의 오랜 스승은 말했다

 오랜만에 그분을 찾아간 날이었다. 나의 야윈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말했다.

"밥부터 먹자"

답답한 마음을 버티다 못해 무가내로 스승을 찾은 나는 어느새 펄펄 끓는 동태탕을 앞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막걸리 한 잔은 해야지"

물끄러미 나를 보던 스승은 차분히 내 앞에 놓인 양은 사발을 가득 채워주었다. 한 잔을 비우면 또 한 잔을, 다시 한 잔을 꼴깍 털어 넣으면 새로 한 잔을.

근 2년 만에 찾아온 제자에게 왜 왔냐며 따져 묻지도 않고 그는 내게 거푸 술을 따라주었다.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입속으로 얼큰한 동태탕을 떠 넣으며 나는 말했다.

"선생님 너무 힘이 들어요. 세상이 저한테만 가혹한 것 같아요. 저는 참 운이 없는 사람인가 봐요"

사랑을 잃은 이야기. 꿈을 잃은 이야기. 아니 어쩌면 사랑을 잃었기에 꿈조차 잃어버린 이야기...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어른 흉내를 내면서도, 마음에 든 멍자국을 스스로 매만지기도 벅차 하는 나 자신의 초라함을 한탄하는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타는 듯 연신 술잔을 비워내며. 그가 한 잔 한 잔을 들이켤 때마다 내 이야기는 점점 더 처연해져 갔다.


 뻔하디 뻔한 청춘의 쓰라림을 횡설수설한 말로나마 그에게 훌훌 털어내니, 이젠 내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던 진짜 고민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 아마도 나를 잘 아는 그는, 내가 조금 뒤 그 '진짜' 이야기를 하겠거니 싶어 묵묵히 기다렸을 것이다. 혀끝에서 느릿느릿 단어를 고르던 나는 끝내 머릿속에서 '도태'라는 말을 떠올렸다. 도태되는 기분. 그렇다 내가 그를 찾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마음속 웃자란 욕심에 비해, 당시 나의 처지는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친구들이 이루어낸 성취들에 진심 어린 박수와 찬사를 보내면서도 나는 아무런 성취도, 아니 성취 비슷한 무언가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대학으로 사회로 진출할 때, 나는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생의 가장 젊은 나날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거기에서 오는 압박감과 휘청이는 자존감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를 잘 아는 오랜 스승 앞으로 도망친 것이다.


'도태'라는 단어는 다시 또 그렇게 우리의 밥상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많은 말들을 묵묵히 들어준 나의 오랜 스승은 마침내 내게 말했다. 당시의 나와 같이 오래도록 무언가의 지망생이었던 자신의 청춘 이야기를, 그래서 마음과 생각이 많이도 작아졌던 그때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내게 말했다.

굳이 사회가 正道(정도)라 정해놓은 방향과 속도에 발맞추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갉아먹지 말라고, 저마다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걷는 그 과정이 바로 우리의 특별함을 만들지 않겠냐고. 방황하는 제자를 달래기 위해 그가 자신의 생에서 건져 올린 말은 그것이었다. 나는 빈 막걸리병을 상 아래로 치우는 동안에도,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그 말을 내내 곱씹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스승의 말을 머리로 입으로 수천수만 번 되새김질하며 내 앞에 놓인 방황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지나간 시절, 그의 말이 흔들리던 나를 붙잡아준 막연한 희망이었다면 지금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제 그것은 내게, 하나의 자명한 삶의 진실을 뜻한다. 남들보다, 그리고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보다 도태되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얻어내지 못했을 수많은 생각들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글 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삶을 바라보는 시야의 넓이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물론 여전히 좁고 얕다) 그 도태의 시간이 내게 선사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도태'라는 말을 뒤집으면 '태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갑갑하고 답답한, 그래서 철저히 외로운 그 도태의 시간을 견디면 삶의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뀐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남달리 늦된 나는, 그렇기에 많이도 아파하던 나는 이제 느리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것은 남들보다 더 많이 망설이고 두리번거리며 더 많은 것들을 풍부하고 자세하게 봤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테니까. 남달리 보낸 그 시간 덕에 그야말로 남다른, 달리 말하자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답답한 마음과 얼큰한 동태탕을 안주로 연신 막걸리를 삼키던 그날을 떠올린다. 나의 오랜 스승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이 내 삶에 가져온 변화들을 생각한다. 그가 내게 해 준 소중한 말을, 그 시절의 나처럼 휘청거리는 누군가에게 전해주고자 이렇게 허락 없이 글로 옮긴다.

그가 이 글을 읽고, 쑥스러워 나를 탓한다면 그의 동네로 가야겠다. 그에게 애교 섞인 사죄의 의미로 동태탕과 막걸리를 대접해야겠다.  그는 아마도 친절히 웃으며 내 잔 가득 막걸리를 따라주겠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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