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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Feb 24. 2022

완도, 도망쳐서 도착한 그곳에서

 P선배의 연락을 받은 날에도 어김없이 분주하고 답답한 마음이었다. 내 앞에 얽히고 얽힌 복잡한 상황들과, 매일같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원고 작업 그리고 요즘따라 부쩍 나를 괴롭히는 불안과 불면의 밤에 지독히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나의 복잡한 마음이 선배에게도 가닿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수화기 너머로 내게 갑작스러운 완도행을 제안했다. 그즈음 나는 일상의 벅참 속에서 도망칠 ‘적당한’ 명분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넌지시 던지는 그의 제안에 넙죽 “좋아요 형”하고 답한 것을 보면. 그 후 바로 짐을 꾸렸다. 짐을 챙기는데 드는 작은 부산스러움조차 부담이 되었으므로 오로지 소로우의 <월든>과 카메라 한 대, 이 두 가지만을 가방 안에 넣었다. 옷가지나 약간의 화장품조차도, 그야말로 도망과도 같은 나의 여행엔 사치에 불과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호남행 버스 안에서 나는 내내 잠을 잤다. 전날 새벽, 또다시 나를 몰아붙이던 불면증의 여파였다.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단다. 눈을 떠보니, 버스는 완도대교를 지나며 푸르른 남해를 횡으로 가르고 있었다. 완도 시내에서도 택시를 타고 한참이나 더 들어간 곳에 자리한 정도리(正道里)의 한 집에 짐을 풀고 등을 붙였다. 작디작던 선배의 유년시절이, 선배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추억이 잔뜩 묻은 그 집이 정겹게 나를 맞이했다.     

 

 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마당 한편에 놓인 낡은 경운기를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려던 찰나,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신 선배의 할아버님께서 “크-흠” 헛기침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할아버님 뒤를 얼른 따라 들어가 절을 올리고 통성명을 드렸다.

“자네는 경주 최가인가?” 할아버님께서 내게 건네신 첫 말씀은 바로 나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도리, 바른 길(뜻)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이 마을을 닮아온 당신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물음이었다. 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바른 시작이 무엇보다 중요할 테니까, 어떤 길을 걸어갈 때는 처음 먹은 마음을 잃지 않아야만 끝까지 똑바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통성명을 마치고 마을 뒤편 바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나는 할아버님의 그 물음을 내내 곱씹었다.     

 

 집에서부터 가시나무숲길을 따라 10여 분을 걸으니 눈앞엔 둥글둥글 몽돌로 이루어진 바다가 펼쳐졌다. 타조알처럼 동그라니 잘 깎인 회색 돌들이 아홉 개의 층을 이루며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깔려있었다. 자갈이라 하기에는 조금 크고, 바위라고 하기에는 다소 작은 진회색 돌들이 군락을 이루며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구계등, 아홉 개의 계단이라는 이름과 걸맞은 풍경이었다. 파도가 너울대며 이 자갈 계단을 훑을 때마다, 몽돌이 서로의 몸 위를 구르며 특유의 소리를 냈다. 좌르륵 혹은 드르륵. 파도가 세게 치면 몽돌들은 온몸으로 그 파도를 맞으며 좌르륵 드르륵 하고 거세게 소리쳤다.


 지나가시던 어르신의 말씀을 빌리자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짝지라고 부른단다. 짝지의 의미를 물으니 자갈밭을 뜻하는 전라남도 사투리라고 한다. 그 옛날 일기예보도 없던 시절, 짝지가 좌르륵 드르륵 유난히 구슬피 우는 날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에게 바다로 나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짝지가 우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다. 오늘은 파도가 몽돌을 그리 아프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몽돌들은 저마다 작은 소리를 속삭이고 있었다. 짝지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가져 간 맥주 캔을 땄다. 몽돌들이 속삭이는 그 소리를 안주삼아 꼴깍꼴깍 맥주를 삼켰다. 취기가 오르자, 도시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내 산란한 마음이 어느새 좌르륵 드르륵 파도에 씻겨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멀찍이 보이는 남해의 수평선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튿날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파도에 마음의 체증이 씻겨나간 덕인지 아니면 뜨끈한 아랫목에 등을 붙이고 잠을 청한 덕인지, 전날 밤은 이상하게도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잤고 평소에는 잠들지도 못하던 그 이른 시간에 개운하게 눈이 떠졌다. 덕분에 귀한 생각과 멋진 풍경을 선사해주신 할아버님께 정성 어린 밥상을 차려드릴 수 있었다. 짝지의 몽돌처럼 사방이 둥근 두레 밥상에 둘러앉아 수저를 움직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여행의 이유를 묵묵히 들으시던 할아버님께서는 배를 타고 청산도에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말씀하셨다. 그곳은 내가 떠나온 도시와는 달리 느림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선배가 찾아온 여행지에도 마침 그곳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흔쾌히 그러겠다며 할아버님께 답했다. 상을 물리고 할아버님께 인사를 드린 후 집을 나섰다. 내 불면증을 잠시 멈춰준 낡은 한옥에게 고마워서 그곳의 풍경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았다. 한 걸음에 한 컷. 얼른 오라며 울려대는 택시의 클랙슨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그 집을 눈과 카메라에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천천히 기록하고 있었다.       


 완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약 1시간여 새파란 다도해를 가르며 도착한 곳, 그곳엔 느림의 섬 청산도가 있었다. 미리 대여해 둔 전기자전거를 타고 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아 아직은 채 성글지 못한 단풍나무숲과,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해의 온화한 날씨를 온몸으로 말해주는 동백꽃 군락. 영화 서편제를 찍었다는 오래된 남도의 한옥과 가장 높은 곳에서 호랑이의 기세로 청산도를 지키는 범바위. 계단처럼 켜켜이 쌓여 모진 해풍을 막아내는 구들장 논과 푸르고 맑은 다도해를 한눈에 조망하도록 해주는 화랑 전망대.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부러 느리게 밟으며 이 벅차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 섬의 사람들이 왜 느리게 살 수밖에 없는지, 왜 세계가 이곳을 슬로 시티로 치켜세우며 온갖 공해로부터 지키고 싶어 하는지,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산다면, 아니 적어도 이곳을 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토록 비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청산도는 내게 조금 덜 분주한 삶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청산도 구경을 끝으로 완도 여행을 마쳤다. 충분한 위로와 넘치는 배움을 얻고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탔다. 힘차게 구르는 바퀴의 진동을 느끼며 이 버스가 목적지까지 예상보다 느리게 도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또다시 치열하고 분주한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므로.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소로우의 <월든>을 펼쳐 들었다. 소로우가 도망쳐 도착한 월든 호숫가처럼, 내가 도망친 그곳에는 이 땅의 끝 완도가 있었다는 은밀한 공감대가 그의 글 한 구절 한 구절을 더 깊이 곱씹게 했다. 이내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다시 얼마 동안은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한 것처럼, 차의 바닥난 기름을 새로이 채운 것처럼 내게 얼마간의 삶을 버텨낼 힘이 생긴 기분이었다.


 일상이 싫어 도망친 그곳에서 다시금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었다는 것은 참 역설적인 일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이 역설 덕에 때때로 벅차고 모진 우리의 삶을 근근이 버텨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이 벅찬 일상을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의 경우는 결론이 났다. 나는 언제고 또다시 완도에 갈 것 같다. 모진 일상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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