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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Jan 10. 2021

얼마간의 지적 방황기를 보내며

그리하여 맺어진 나의 다짐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기형도 <대학시절> 중

 재작년 말 일명 '조국 사태'로부터 시작된 기성 정치권과 지식인들에 대한 개인적 불신을 기형도의 시구절에 기대어 적어낸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적은 이 글은 스스로에게 의문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것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기성 지식인들로부터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가슴 깊이 새겼던 그들의 문장들과 그것의 기저에 깔린 정신들, 그리고 그로부터 정립된 나의 짧은 생각들이 ''과연 옳을까'' 하는 의문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다시 내게, 어쩌면 삶의 변곡점일지도 모를 일종의 지적 방황의 시기를 선사했다.

 보통 한 작가에 빠지면, 그를 나만의 스승으로 모시며 글을 읽고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그 작가의 작품으로 가득 채운다. 일종의 벽.
생각이 본격적으로 영글기 시작했던 고교시절, 언제나 내 가방에는 조정래 작가의 책이 들어있었다. 그의 책은 잠자고 있던 나의 감수성을 깨워, 나를 동료 인간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살아왔다기보단 살아냈다는 말과, 아니 어쩌면 버텨냈다는 말과 더 잘 조응하는 스무 살 초엽 내 하루의 끝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있었다. 상실에 허우적거렸던 그 시기그의 문장은 내게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혈기와 정의감에 불타던 이십 대의 초반, 나의 글에 더 센 힘이, 더 날카로운 논리가 붙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유시민의 글을 끊임없이 읽고 따라 적곤 했다. 그의 글은 내게, 이렇게 부족한 글이나마 마음껏 적어낼 수 있게끔 하는 자신감을 건네주었다.

 이십 대의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오던 작년 말에서 올해 초까지, '조국 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과, 이를 비호하는 진보 지성인들의 기울어진 정의관과 식어버린 반골 정신을 바라보며 나의 지적 방황기가 시작되었다. 품고 있던 유시민의 책을 내려놓고 칭송하던 586세대의 정신을 버렸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불의에 함구하는 그의 소시민성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던 <대학시절>의 기형도처럼, 이제 어떤 이를 존경하고 어떤 글을 읽어야 할지 막막했다.

 이렇듯 혼란에 휘청이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수많은 책을 뒤적여도 보았다. 시, 소설, 수필, 희곡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도 봤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수많은 명사들의 강연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이따금 아무것도 읽거나 볼 흥미와 힘조차도 잃은 탓에 가만히 앉아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막연히 기대어 앉아 오롯이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던 그 짧고도 긴 시간. 나는 이제 무얼 바라며 글을 읽어야 할지, 누구에게 정신적으로 기대며 읽고 써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자락 어디쯤에서 앞으로의 시간들을 채워낼 짧고도 명료한 한 단어를 건져 올렸다. 그것은 바로 '꿈'이었다. 아무것도 읽기 싫고 써내기 버거울 때에도,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경험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끄적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정신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한 줄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업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꿈(카피라이터).
그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일조하고자 하는 꿈. 내겐 그 꿈이 있기에 더 이상 방황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덮어놓았던 책과 공책을 펼치고 펜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나는 한 작가에 빠져 그의 책만 주야장천 읽어대는 벽에서 벗어나려 한다. 금이야 옥이야 품던 '텍스트'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더 많은 것을 더 다양하게, 보다 더 깊게 알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 일상을 채우는 크고 작은 일들에, 내 일상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에 이전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낯선 환경에 나 스스로를 밀어 넣기도 한다. 평소라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낯선 영화들에, 난해한 그림들에, 기묘한 사진들에, 익숙지 않은 노래들에 관심을 갖는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이해하면 이해하는 대로, 공부가 필요하면 공부를 해가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카피라이터들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불후의 저서 카피 캡슐의 저자 헬 스텐빈스는 이렇게 말했다. ''카피라이터는 보는 것의 자유를 즐겨야 한다. 카피라이터는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아야 한다. 알아야 얘기를 하지!'' 그의 말은 오늘날 나의 결심을 대변하는 듯하다. 어쩌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하는 노력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익숙지 않은 무언가를 경험하고 공부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리고 이것을 가슴 깊숙이 다짐하자 다시 또 많은 것이 알고 싶어 졌다. 아무것도 알기 싫던 나의 지적 방황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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