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조리개 군중

묶여 불리는 이름들에게

by 최성우

아이야 모두가 불타는 목마름으로 우짖던 그 어느 날 우리는 마침내 주인이 되었단다

맨 앞줄에 서있던 형들과 누이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져 가고 내 가슴속 불꽃 차츰 흐려지던 그 어느 날 네거리 가득 성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왔단다

핏발 선 그들의 눈이 내 가슴속 말라가던 풀잎에 달디 단 한 모금 물을 뿌려 주었단다.
그중엔 지금의 너처럼 새하야니 고운 손을 가진 못다 핀 청춘이 있었겠지

마침내 우리는 주인이 되었고 내 가슴속 시들던 풀은 어느덧 새파란 풍광을 이루었단다

이제 와 뜨거웠던 추회, 나의 먼 옛이야기지만
아직 내 귀엔 불타는 목마름으로 우짖던 나와
우리의 핏기 어린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작가의 말.

이 시대의 기억은 다음 시대로 전해진다.
그 과정 속에서 곡해와 오독을 포함한 채 말이다.
이 시대를 이루던 비극이나 이에 맞서는 역동,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머뭇거림이 전부 다 후대에 전해질 수는 없다.

시대의 비참 앞에서 누구나 열렬한 투사일 수는 없다.

열렬한 활동가가 되어 핏발 선 목소리로 자기 앞의 생을 피와 땀으로 물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곁 어딘가,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웅크린 채 근근이 그 비참한 하루들을 버텨낸 사람들도 있다.

역사는 결국 목소리가 컸던 사람들을 기억할 테고, 또 기록할 것이다. 다만 나름의 눈으로 역사를 읽어내는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 더 소외되어 있는 곳으로, 채 기록되지 못한 곳으로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현실과 두려움과 온갖 책임들에 매어 열렬한 투사이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역사를 일군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었다. 어쩌면 민초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이들에 대한 애도일지도 모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에 빠질 때면 종로 3가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