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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r 01. 2021

사랑에 빠질 때면 종로 3가에 간다

 몇 번의 사랑과 몇 번의 이별을 지나오며 알아낸 사실이 있다. 나라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바라는 게 아주 많아서, 내가 쉽게 사랑에 빠진 상대에게는 그만큼 쉽게 실망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을 오래 앓는다.
매번의 사랑은 나를 나름대로 아프게 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날 아주 많이 아프게 했고, 어떤 사랑은 내가 상대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로 도로 날 아프게 만들었다.
어릴 적 무언가를 먹고 단단히 체해 본 사람이 다시는 쉽사리 그 음식을 먹지 못하듯이, 사 오래 앓은 나는 사랑을 시작하기가 늘 어렵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시작할 때면 상대방이 가진 마음의 결을 신중하게 살핀다. 누군가 사랑은 타이밍이라던데, 나는 반대로 시간이 오래 걸려 그 사람을 놓친다 더라도 사랑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도적으로 늦춘다.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함께 만나며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의 감정과 태도에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시시때때로 변하는 나의 감정과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태도와 가치관이, 결국은 우리의 마음의 결이 잘 어울리는지 서로 살필 시간을 마련한다.


 나는 그 유예의 시간에 그 사람을 데리고 종로 3가에 간다. 새로 생겨 네온사인과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번쩍이는 익선동, 서울의 과거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는 인사동, 아주 허름해서 더 인간적인 포장마차 거리, 이 모두를 품은 종로 3가에 간다.

 우리는 점심 즈음 종로 3가 4번 출구 앞에서 만난다. 건너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이 시점에서 비가 조금 와 우산을 펼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골목은 좁으니 펼친 우산은 하나일 수밖에 없을 테고, 우리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우산 안에서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점심 식사의 가격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가장 비싼 파스타를 먹고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먹으며 서로의 기류를 살핀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이 식당에서 가장 비싼 메뉴들보다도 더 비싼, 저 사람의 마음결이다. 번쩍거리는 식당에서 비싼 메뉴를 먹으며, 우리의 대화가 조금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고상한 취미에 대해, 어쩌면 그것보다 더 내밀한, '돈'을 둘러싼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식사 후에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 채로 낙원상가 앞을 지나 인사동으로 향한다. 지나가는 길에 이름 모를 누군가의 손 때가 묻은 잡동사니를 구경한다. 그리고 골목에 숨어있는, 아주 오래된 나무 간판을 내건 찻집에 들른다.
어쩌면 나는 국화차를 시킬지도 모른다.

고요한 찻집과, 정갈한 차 앞에서 우리의 대화는 아까보다 조금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술에 대해, 어쩌면 서로의 얄팍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차가 다 식고, 우리의 대화가 무르익으면 조금 더 친해진 우리는 종로 3가 13번 출구 쪽을 향해 조금 걷는다. 빨간 천막들이 줄 선 포장마차 거리에 간다. 가장 한적한 포장마차 하나에 들어가 싸구려 플라스틱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찬가지로 싸구려인 플라스틱 의자에 마주 앉는다. 안주는 좋아봐야 삼겹살 구이일 테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싼 곰장어나 고등어구이 일지도 모른다. 화장실조차 없어서, 급한 볼일이 생기면 서울극장이나 종로3가역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 테다.
우리는 사람 냄새나는 그곳에 앉아,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서로의 인생살이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한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는 충만해진다. 저 사람의 가장 화려한 모습과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모두 본 것만 같은, 따뜻한 착각에 빠진다. 아니 어쩌면 오늘 하루 동안 나의 양가적인 모습들을 다 보여준 것만 같아 홀가분해질지도 모른다.

 사랑에 오래 앓는 나는, 사람을 오래 본다.

사랑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일 테니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건 결국 사람 때문일 테니까.
사랑을 시작할 때면 장소에 따라, 아니 더 정확히는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변하는 나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싶어 한다. 어쩌면 서로로 인해 오래 앓을지도 모를, 상대방과 나의 마음을 위해서. 그래서 언제이고 사랑에 빠질 때면, 나는 종로 3가에 간다. 종로 3가는 나의 사랑을 다그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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