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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Jun 28. 2021

수국

 그해 여름, 제주에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다.

내리는 비를 흠씬 맞으며 새벽같이 숙소를 나섰다.

오로지 수국만을 보기 위해 떠난 여정이었다.

사방을 아름다운 수국으로 가꾼 시외의 한적한 카페에 닿자마자 새벽녘에 쌓인 피로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2000평이나 되는 밭을 온통 수국으로 채우기 위해 많은 돈과 정성을 들였을 주인장은 단지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는 누구에게나 그곳을 구경하도록 허락한다. 창 밖의 수국 군락에 시선을 빼앗긴 내게 주인장이 내민 한 잔의 커피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 때문인지 그간 제주에서 마셨던 그 어떤 커피보다도 향긋했다.  

   

 커피에 곁들이면 좋을 황갈색 피낭시에를 내게 건네며 주인장은 말했다.

"수국은 흙의 산성도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꽃이래요. 그러니까 꽃의 색은 결국 흙이 가진 고유의 색을 보여주는 거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국은 정말이지 특별한 꽃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반신반의한 나는 잽싸게 휴대전화를 들어 검색창에 '수국' 두 글자를 입력했다.

<수국은 토양이 산성일 때는 청색을 띠게 되고, 알칼리 토양에서는 붉은색을 띠는 재미있는 생리적 특성을 가진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음을 휴대전화가 내게 알려주었다.


 머리로는 수국을 이해했으니, 이제는 몸으로 겪을 차례.

본격적으로 수국 밭을 걷고자 반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도열한 수국들은 군락별로 뚜렷한 색의 경계를 보여주었다. 나는 수국 밭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제주의 푸른 바다를 닮은 파란색의 수국 사이를 헤엄치고, 한라산의 노을을 닮은 진분홍의 수국 틈새를 오르내렸다.

흐드러진 수국 위에는 수만 송이의 물방울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맺혀있었다. 송이송이 내걸린 탐스러운 빛깔에 매료된 나는 그 위에 맺힌 물방울들을 손으로 훑었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동안 어느새 내 손을 흠뻑 적시는 물기를 바라보며, 내게도 수국의 멋들어진 빛깔이 스미기를 바랐다. 이다지도 아름다운 제주의 여름이 내게 온전히 묻어날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제주 여행은 본전을 넘어 남는 장사일 텐데 말이다.


 나는 꽃잎이 가장 풍성한 수국 한 송이를 골라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 사진을 곧바로 휴대전화에 옮겨 친구들에게 전송했다.

''수국은 흙에 따라 색이 변한대''

곧이어 각양각색의 답신이 내게 도착했다. 내 눈은 그중 하나의 답변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사람이랑 똑같네''


 그러고 보니 사람은 수국을 닮았다.

수국 주변을 둘러싼 흙이 수국의 색을 결정한다면,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한 사람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과 그가 보고 겪는 모든 일들은 그 사람의 결을 이룬다. 그의 생각과 마음과 심지어는 표정까지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수국을 길러내듯이 나 스스로를 키워내면, 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한 송이의 꽃에서 비롯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내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다소 거창한 주제로 향해왔다.


 수국을 원하는 색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알맞은 산도의 흙이 있어야 한다. 파란색 수국을 기르고 싶다면 꽃 주변을 산성도가 높은 흙으로 바꿔주면 된다. 반대로 붉은색의 수국을 기르고 싶은 사람은 꽃 주위를 알칼리 성분이 가득한 흙으로 채워주면 된다. 마찬가지로 나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 주변을 그와 비슷한 성질의 것들로 채우면 되지 않을까? 가령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앞으로의 삶에서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곳을 다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되지 않을까?


 하기사 복잡 미묘한 인간사가 수국이 피는 것처럼 이리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살다 보면 여타의 이유들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원치 않는 경험들에 나를 노출시켜야 하는 날들도 많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리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내 뜻대로 내가 되는 법은 두 가지가 아닐까.

하나는 말 그대로 그 '어떤' 것들로 나의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것.

이것은 품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그

'어떤' 것들을 찾아다녀야 할 테니까. '어떠지 않은' 것들을 애써 무시해야 할 테니까. 또, 부작용으로 나라는 사람의 생각이 다소 편협해질 수도 있겠다. 그 편협성이 나에게 우연히 닿을지도 모를 모종의 긍정적인 변화들을 사전에 막아버리는 불상사를 초래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조금 더 현명한 방법, 둘째는 내가 겪는 모든 순간에서 저마다의 '어떤'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일의 선결조건은 앞으로 내가 겪는 온갖 사소한 것들에도 최대한의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테다.

내가 지금 겪는 일들, 혹은 나와 마주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멋진 구석이 있는지 느긋하게 살펴보자.

때론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일에서, 혹은 내가 인연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배울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더라도, 적어도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이라도 얻어내자.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린 제주의 여름은 유난히도 많은 생각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 비가 피워낸 형형색색의 수국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의 빛깔은 지금과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상에 치여 내 삶의 빛깔이 점차 흐릿해져 갈 때, 다시 또 수국을 보러 제주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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