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백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로고 공모전에 참가 후 손에 쥔 54만 원은 달고 쓰고 비릿하고 매웠다.
"이게 된다고?"
좋게 말해서 손그림, 누가 봐도 낙서 같은 내 로고는
비주류 감성인 나와 결이 같았던 일면식도 없는 사장님이 선택해 주셨고,
주변인 모두에게 "시작이 좋다" "너의 제2의 커리어가 이렇게 열리는구나." 등 시기질투 하나 없는 오롯한 덕담을 들으며 감히 탄탄대로를 꿈꾸게 했다.
하지만 곧 54만 원어치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내 로고를 선택한 사장님은 540만 원어치를 원하셨고
내 실력은 아직 5천400원이기 때문에 그 괴리를 쉽게 메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업계 고수에게 내 컴퓨터를 내어드리고 나는 뒤에 앉아서 그녀가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조용히 앉아 그녀의 타자소리를 듣고 있자니, 20년 전으로 타임슬립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대에 일을 배울 때 내 사수는 호랑이 같았다.
모든 거래처 직원들이 그녀 앞에만 가면 작아지는 매직을 가장 가까이서 직관했었다.
나는 작아진 그들보다 더 작았던 마이크로 미니 꼬꼬마였다.
내가 해결 못하는 모든 일이 그녀한테만 넘어가면 5초 컷으로 해결되는 기이한 일들을 수년 동안 겪고 나서야 나에게도 그녀 발 뒤꿈치를 쫓을 정도의 내공이 겨우 쌓였는데, 내공을 좀 써보려 하니 회사에서는 나가라 했다.
( 눈물 나서 여기까지 )
이 시절 나의 모습과 지금 나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자마자
아주 먼 곳에 있는, 지금을 닿을 수 없는 그 내공이라는 것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도 이 내공을 쌓으려고 20년 동안 얼마나 애를 썼겠는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닐수록 더 갖고 싶을 거.. 라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 포기하고 싶어 진다.
이게 어린 나와 나이 든 나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어쨋든, 이런 날이 쌓여서 내공이 돼.. 거나 말거나..
난 이미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생겼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54만 원어치 쇼핑을 했다.
늙어서 그런지 상처회복도 더럽게 더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