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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임상 실험 보고서(4)

깜빡하고 약을 제대로 복용 못 했을 때

by 몽도리

사람에 따라 다 다르지만 약이 영향을 크게 미치는 사람도 있고, 좀 덜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나마 영향을 덜 받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약봉지를 탈탈 털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는 약이 있었어야 했다. 깜빡하고 두 번 먹은 날이 있는가 보다. 약을 먹고 나면 졸리고 몸이 처지는 것 같아서 항상 아침에 약을 먹고 나서 컴퓨터 학원을 가는 시간 사이에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믹스커피를 찾아 타서 조금 마시고 학원으로 향했다. 오히려 마음이 더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덜 졸리겠네.' 결과적으로 학원에서 덜 졸렸다. 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지고 멍해지는 게 느껴졌다. 엑셀 함수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국비지원받고 자비로 낸 금액이 40만 원, 반드시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러자 초조함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약을 먹다가 하루 이틀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는 이때까지 복용한 기간에 달려있기도 하다. 나는 4개월째 복용 중이다. 보통 일주일 정도 복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먹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지는 게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나는 우울증이 재발했을 때 내가 약에 내성이 생긴 줄 알았다. 효과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발의 경우 약이 효과를 내기까지의 기간이 첫 번째에 비해 더 길어지고 낫는 기간도 더 길어진다고 한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게 조급함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약에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내 기준에서 약에 의존하는 것은 약 때문에 조마조마하고 '어떡해, 약 안 먹었어. 이러다 안 낫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맹목적으로 나의 회복이 약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이다. 복용을 깜빡했다면 빨리 복용을 하거나 없으면 툴툴 털어내야 한다.


약은 매일마다 먹는 습관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결국 노력과 회복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노력 안에 '약'이 들어가는 것뿐이다. 나도 믹스커피를 마시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조는 것과 과다수면이 너무나 싫어졌다. 따라서 최대한 적은 양을 섭취하기로 하고, 아침에 딱 한 잔, 식당에서 뽑아 먹는 자판기 커피 딱 한 컵만큼만 마시고 학원으로 향한다. 잘 생각해 보자, 인지능력이나 기억력은 제일 마지막에 회복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지금 나는 조급하다. 물론 조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심리상태가 오히려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면, 이는 나에게 손해다. 따라서 조급한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추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구축해야겠다. 물론 우울증 초기에는 이런 생각 자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회복을 이어가기 위해서 조급함을 덜어야 한다.


회복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회복 후 액셀을 밟기 위해 지금은 천천히 걸어보자, 할 수 있다. 멘탈 꽉 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잘 붙잡아 놓자. 내 멘탈은 내 것이니 분명 치료를 병행해 나간다면 통제가 가능하다.

나는 약물치료도 상담치료도 받고 있으니 곧 티핑 포인트가 올 것이다. 그 티핑 포인트를 위해 인내심을 가져야만 한다. 티핑 포인트에 다다르게 되면 다리를 고무줄로 꽉 묶어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풀면 혈액순환이 되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온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우울증의 티핑 포인트, 그때는 언제 올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는 때이니, 잘 캐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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