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도리 Dec 06. 2024

토북이 이야기(2)

자신과의 싸움

  둘째 토북이는 눈물을 머금으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주변은 볼 세도 없이 쉼 없이 가고 있던 때, 높은 허들이 나왔다. 토끼들은 깡총 뛰어넘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만의 재주를 사용해 어떻게든 허들을 피해 가고 있었다. 토북이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눈물이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자신의 발에 걸려 있는 파란색 실을 보았다. 그 실을 살짝 당기자, 저 멀리서 실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카피바라가 나타났다. "선생님!!" 토북이는 경주를 시작하기 전 만났던 담임 선생님들 중 가장 만나고 싶었던 선생님께 연락을 한 것이다. 진로 선생님이자 그녀의 담임이었던 카피바라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토북이를 안아주었다. "많이 힘들었겠네, 보아하니, 저 허들이 넘기 힘든 거지?" 토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카피바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토북아, 선생님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줄 수는 있어도 네가 하는 경주를 대신해줄 수는 없어.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야. 대신 네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 잠깐 멈춰서 우리 쉬는 시간을 가지자꾸나. 한 번 네 이야기를 선생님한테 해주지 않으련?" 토북이는 카피바라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토북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한 지점을 지나면 또 다른 지점이 기다리고 있고, 결승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전 너무 느려요.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든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데 저는 평생을 기어가야 하는 건가요?" 그러자 카피바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토북아, 너는 다른 친구들에게 없는 것이 있잖아. 네 단단한 등껍질을 보렴, 얼마나 귀엽고 예쁘니."  토북이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나도 안 예뻐요. 숨을 때만 쓰고 나아가는데 하등 필요가 없어요." 카피바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북아, 동물마다 자신만의 강점이 있는 거란다. 네 단단하고 예쁜 등껍질은 위험한 상황에 너를 지켜주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줄 거야. 그러니 얼마나 좋은 것이니. 남보다 좀 늦으면 뭐 어때. 결승선까지만 가면 되는 거지. 그리고 선생님은 그 결승선을 가봤잖아. 결승선에 대해 얘기해 주자면, 사실, 거기에는 큰 비밀이 있단다." 흥미가 생긴 토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떤 비밀이요?" 카피바라는 웃으며 말했다. "결승선이 자꾸만 나오고 끝나지 않아서 많은 동물들이 당황해하지.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더 빨리 도달하려고 해. 선생님조차 그렇게 살아왔고, 결승선에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죽을 때까지 계속 앞에 놓여있는 거란다. 더군다나 그 결승선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막에 다 펼쳐져 있어. 그러니 결승선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거란다. 굳이 같은 길로 갈 필요도 없고, 같은 속도로 갈 필요도 없어." 그러자 토북이는 놀라며 말했다.

   "그런 줄 몰랐어요. 평생 있는 결승선들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요." 카피바라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세상이란 것일 줄 몰랐지만 선생님은 이 나이에 깨달았잖니. 너는 일찍 깨달은 편이란다. 결국 다 자신만의 싸움이란다. 다른 누군가와의 싸움이 인생의 여정이 아니야. 너는 너만의 결승선으로 가기 위한 너만의 계획을 세우렴. 가다가 길을 잃더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단다. 그 결승선을 통과하고 새로운 결승선이 나오더라도 나중에는 두려움보단 설렘이 기다렸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 까지란다. 자, 이제 너는 어떻게 할래?" 토북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만의 결승선, 그리고 결승선을 향하는 길을 닦아나갈게요." 카피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지금까지는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이 도와줬지만 이제는 네 길을 네가 직접 닦아가며 개척해나가야 해. 길은 여러 갈래로 나아가 있단다. 결국에는 여러 길로 나눠져 있는 미로와 같은 경주를 모두들 마라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미로는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거든. 길을 잃는 재미, 새로운 길을 찾는 재미, 전부 놓치지 말고, 주변을 살피며 모든 행복을 누리며 앞으로 나아가렴."

   카피바라의 도움으로 힘이 생긴 둘째 토북이는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고하며 앞으로 나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토끼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경주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게 나는 왜 토끼들과의 경주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다들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길을 닦고 있는 거였는데. 이걸 내 형제들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둘째 토박이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스스로 깨달으며 나아가야 해. 내 형제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는 거잖아." 토박이는 주변을 탐색하며 황량한 사막에 핀 선인장을 보았다. 그녀는 다가가서 선인장에 나 있는 과육을 따려 했다. "앗, 따가!" 가시에 찔려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가시가 박힌 손으로 선인장 과육을 맛있게 먹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그래, 이런 거였어. 내가 바라던 것,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 바라보고도 그냥 지나친 것, 별 거 아니지만 지금 정말 행복한 걸. 다른 경쟁자들은 생각도 안 나. 느려도 되는 거구나. 잠시 멈춰 서서 다른 쪽으로 빠져도 되는 거였어."

   토북이는 미소를 지으며 선인장을 계속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결승선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말이다. 한편, 아빠의 상처를 자신이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셋째 토북이는 한숨을 쉬며 아빠를 꼭 안고는 말했다. "아빠, 빨리 나아.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언니가 멈춰 서지만 않았어도..." 거북이는 셋째에게 말했다.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 이게 다 아빠가 부족해서 그래, 아빠가 미안하다." 이에 셋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빠.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나저나 언니가 너무 걱정 돼. 혼자서 잘 가고 있을까."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응원을 받고 갔으니 이제 저 멀리로 나아가고 있을 거야. 너도 더 자라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결승선을 향해 갈 수 있어." 셋째는 아빠에게 딱 붙어 말했다. "지금은 천천히 아빠랑 갈래. 아빠, 아빠는 더 이상 경주 안 하고 쉬면 안 돼? 아프잖아. 왜 되돌아온 거야? 왜 우리한테 다시 온 거야. 엄마도 마찬가지고, 아빠랑 엄마의 레인은 저 옆쪽에 있잖아." 이에 거북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네들이 힘든데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그게 가족인 거야. 그리고 나는 가장이니까. 너네들을 끝까지 지켜줄 거야. 부족한 아빠 만나서 너네들이 고생이 많다. 아빠는 너네가 경주에서 신을 마라톤화나 장비들을 사 줄 돈은 없어. 대신 최선을 다해서 너희들을 돕고 싶어. 그게 아빠니까."

   셋째는 아빠를 안아주며 말했다. "아빠는 최고의 아빠야." 거북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맙다." 한편, 결승선은 다 까먹고 선인장의 달콤함에 빠져 계속 다치는데도 과육을 먹고 있던 둘째 토북이는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벌러덩 누웠다. "그래, 애초에 결승선은 내가 정하는 건데 뭐 어때." 그러다 문득 깨진 등딱지의 아빠가 떠오르자 그녀는 손에 쥐었던 선인장 과육을 집어던지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지.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그녀는 이제 선인장을 피하며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가는 길에 지쳐서 쉬고 있는 오빠를 발견한 둘째는 오빠한테 달려갔다. "오빠, 왜 멈춰 섰어. 뭔 일 있어?" 첫째 토북이가 말했다. "끝이 안 보여. 나만의 길을 가라고 주변에서 조언을 해주길래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하더라. 너는 내 나이 되기 전에 준비를 해. 그 결승선은 누구나 다 결국 넘어야 해." 둘째 토북이는 당황하며 말했다. "결승선은 우리가 직접 정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첫째는 둘째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떤 결승선은 정해져 있어, 가는 길은 우리가 개척해 나갈 수 있어도, 더 큰 경주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몇몇 결승선은 공통으로 지나가야 해. 나는 하나를 지났지만 다시 여기로 돌아왔잖아. 그러니 돌아온 곳에서 너에게 말해주는 거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라고.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첫째는 술을 마시면서 바위에 기대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기 싫지만 안 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둘째는 첫째를 안아주며 말했다. "아니야 오빠, 안 가고 있어도 오빠는 오빠야.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린 오빠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냈으니까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이 나는 오빠 응원해." 첫째는 그런 둘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엄마, 아빠의 말이 전부 잔소리 같았는데 전부 사실이었어. 그래도 나는 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내 과거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다만, 너무 힘들 뿐이야. 힘들어, 너무 힘들다고!!" 첫째 토북이는 주먹을 꽉 쥐며 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터덜터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첫째를 보며 둘째 토북이는 또다시 불안해졌고, 당혹감을 느꼈다. '공통으로 지나가야 하는 결승선, 이게 경주의 함정이구나. 결국 피해 갈 수 없는 거였어. 아무리 작은 장애물들을 피해가도, 결국에는 더 큰 장애물이 가로막는 거야. 이걸 즐기면서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 길을 개척하되, 모두가 가는 곳을 따라가야 하는 운명이라니... 결국에는 다 같은 끝을 보게 되는 걸까... 모르겠어. 일단 가봐야 아니까. 포기하진 않을 거야. 아빠를 위해서라도 엄마를 위해서라도, 아니, 다 떠나서 내 경주를 위해서라도. 완주를 향해 포기하지 않겠어!!'

    둘째 토북이는 숨을 한 번 깊게 내쉬고 부지런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모래폭풍이 강하게 불어댔지만 그럴 때마다 등딱지 안으로 들어가 때굴때굴 구르며 앞으로 나아간 토북이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 어차피 모순 투성이, 모르는 것 투성이인 사막이라면, 나아가면서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야! 그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였어! 그런데 부모님이랑 셋째가 걱정되네." 둘째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갑자기 또다시 불어오는 모래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으아악!!"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들이 전부 둘째를 깨우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둘째는 엄마 아빠를 보자 그들을 껴안았다. "엄마, 아빠, 다들 괜찮아?" 셋째는 다시 돌아와 버린 언니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언니, 돌아온 김에 엄마, 아빠 좀 도와줘. 나도 이제 다시 가야 할 것 같아." 이에 둘째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부모를 바라보며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미안해,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렇게 우리 때문에 아팠는데, 나 다시 돌아와 버렸어. 모래바람 때문에 날려서 왔어. 내가 뒤돌아보고 말았어. 엄마가 그렇게 뒤돌아보지 마라고 했는데, 뒤돌아봤어. 걱정이 돼서, 내가 나중에 돌봐주지 못하고 무능한 딸이 될까 봐."

   토끼와 거북이는 아무 말 없이 우는 둘째 딸을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토끼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했다. 

"괜찮아, 엄마가 이전에 한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재정비해서 너만의 길을 가렴. 걱정돼서 우리 방향 쪽을 뒤돌아볼 필요는 없어. 이 김에 중간 점검을 하고 넘어가면 좋지. 그래도 서두르렴. 사막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너를 기다려주지 않아. 어느 정도의 속도감은 잃지 않고 있어야 다시 출발할 때 더 수월하지 않겠니." 둘째는 물었다. "이해했어요, 근데 아빠랑 엄마 지금 다 괜찮아요?"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둘째 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겪어온 사막의 경주에 비하면 이쯤이야, 뭐. 그리고 너희들이 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힘이 나더라. 다시 돌아온다면 등을 떠밀어주고, 등대가 되어 비춰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도 많이 늙었구나.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렴. 재정비하는데 도와줄 테니.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들, 그 모든 길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란다. 그래도 절대 앞으로 나아가는 걸 잊으며 안 돼. 길을 너무 잃으면 모래 속에 파묻힐 수 있거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