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 정의 내린 삶의 의미
아마 삶의 정의를 내리라면 나는 평생 눈 감기 전까지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고작 19살인 내가 삶에 관심이 많은 건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생각은 더 깊게, 쓸데없는 생각은 많이 하는 이 기질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고 그냥 양면의 날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제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어두웠다. 아무도 없었는데 가는 길에 아주머니 한 분이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무언갈 하고 계셨다. 그냥 잠시 바라본 사이에 넘어졌다. 나는 엄마를 닮아 자주 넘어진다. 그것도 평범하게 넘어진 적이 없고 꼭 누가 보기 민망하게. 넘어졌는데도 나보다 폰이 신경 쓰여 바로 폰의 상태를 확인하고 절뚝거리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피가 잘 닦이지 않았다. 집에 와서 짜증을 좀 부렸다.
아빠가 그때 유난히 기분이 나쁜 때였는지 모른다. 갑자기 "지가 넘어져 놓고 왜 지랄이고. 네가 알아서 치료하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셨다. 아빠는 짜증이 많으신 편이다. 원래 알아서 할 생각이었는데 팍 짜증이 났다.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언제 다쳤냐는 듯 양치를 하고 밴드를 붙이고 누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마치 계속 넘어지는 마라톤 같다고. 상처를 동여매고 다시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기대감을 가지고 뛰기 시작하면 언제 넘어질지 몰라 불안해지고 반드시 또 반드시 넘어지는 마라톤.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망설여지는 새로운 시작. 그리고 넘어졌을 때 옆을 바라보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경주로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어도 알아서 일어나야 하니까.
의도치 않은 자해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능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나 보다 하고 잠을 자려는데 아빠가 갑자기 너무 미웠다. 왜인지 몰랐다. 그냥 미웠다. 무릎이 아픈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자꾸 기분이 안 좋았다. 고작 넘어진 것 가지고. 그것도 한두 번 넘어지는 게 아니라 넘어지는 게 일상인데 도대체 왜. 익숙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기분, 실패를 사랑할 수 없는 심리. 만약 이 마라톤에서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사람들은 완주만을 바라볼 것 같다. 중간중간 멈추는 코스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그냥 앞만 보고 달리고 싶어 할 것 같다. 나를 응원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래서 아주 중요한 것 같다. 한 명이라도 있으면 우리는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심리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은 그저 찰과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