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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리를 찾아서 Apr 22. 2023

아들이지만 같이 못살지...

2002년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사망하셨다.


외고를 자퇴하고 일반고를 다니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고모 집으로 한 달간 놀러 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한 번도 아버지 같은 면모를 보였던 적이 없어서였을까


어찌어찌 아버지의 장례를 잘 마무리하고 나는 고모 집으로 옮겨져 생활하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상황으로 보면 어느 집 하나 제대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모부가 보위부 직원이었으므로 내가 그 집에 얹혀 산다고 해서 가사가 기울 정도는 아니었다.


고모부 성(姓)과 나의 성이 같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아들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온 집안 식구가 같은 성씨를 쓰고 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가 첫째 아들인 줄 알고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무엇을 사더라도 당신들의 아들과 내 것까지 무조건 똑같은 것을 두 개를 사두었다.

하물며 볼펜을 사더라도 조카(나)것과 아들 것을 샀다. 그만큼 친아들과 조카인 나에게 차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촌동생은 생각과 다르게 친절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족에 사촌이라는 불청객이 들어와서 사랑을 뺏어가니 그럴 만도 했다.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은 그 친구 몫까지 내가 챙기고 고모부나 고모가 없는 시간이면 집안일을 그 친구 몫까지 내가 다 했다.

현대판 신데렐라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그 정도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끔 화가 치밀어도 참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러던 중 귀 파는 것을 좋아하는 사촌이 어느 날 나에게 귀를 파달라고 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귀를 파달라고 했고 이날은 이미 여러 차례 싫다고 했음에도 끈질기게 요구했다.

나도 참지 못해 신발을 벗어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대판 싸웠다.


그날저녁 고모부가 퇴근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듯 먼저 말을 꺼낸다.

"너희 싸웠니?"

"별것 아닌 걸로 싸웠는데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라며 고모가 맞받아 쳤다.


머리 숙이고 밥을 입에 몇 숟가락 넣을 때쯤 들리는 목소리

"이렇게 계속 싸울 거면 같이 못살지"

어?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분명 그랬다. 이 말의 촉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어떤 화살촉보다 아프고 검은 사약보다 진했다.

자초지종 들어보지도 않고 놓은 얼음장이었다.


"아 고모부 잘못했습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고모는 그날밤 울며 나간 내가 안쓰러웠을까

고모부는 마음이 불편했을까

사촌은 오히려 속 시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댓글로 주시면 아는 것만큼 기억해 글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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