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딴이란 것을 아는가?

2022. 1. 8.

by midsunset


자주 가는 정육식당이 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들렀다가 소고기 맛을 제대로 모르고 살던 나를 소고기에 눈뜨게 해 준 집이다. 가족의 입맛은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좋은 식당을 찾아가도 아이들이 그 식당 소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는 날에는 며칠 먹을 고기를 넉넉히 사 오곤 한다.


아침에 아이들 카레를 해 주려고 지난번에 그 정육식당에서 사 온, 냉동실에 있던 고기를 어젯밤에 잠깐 꺼내 두었다가 냉장실에 넣을 것을 깜박하고 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침대에 누워서 책 읽을 땐 그렇게 아무 생각도 안 들더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고기 생각이 났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주방으로 가 보니 설마가 역시였다. 겉포장을 만져보니 아직 시원했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두 점 구워보았다. 냄새도 안 나고,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야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볶다가 고기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넣을까 말까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고기가 좀 들어가야 맛있을 텐데 생각이 들어서 야채들에 고기를 잘라 넣고 더 볶았다. (야채 카레로 마무리를 지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후회가 막심하다.) 카레가루를 넣어 잘 끓이고 걸쭉해질 즈음에 맛을 봤는데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영, 아이들에게 내어주기가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다.


약간 엉뚱하게도 나는 음식이 오래된 것 같을 때 가끔 ‘피딴 문답’이라는 고등학교 때 읽은 수필이 떠오른다. 오리알이 오랫동안 숙성된 것을 피딴이라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두 친구가 나누는 대화가 나오는 짧은 수필이다. 오랜 기간 숙성을 거쳐 좋은 음식으로 탄생하듯 사람도 성숙하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비유를 하는데 거기서 소고기를 예로 드는 부분이 나온다. 썩기 직전의 소고기에서 독특한 풍미가 나는데 아주 조금 시점을 넘기면 썩어버리고, 그 적정 시점을 맞추지 못하면 그 풍미를 놓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용의 중요함을,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도에 대한 이야기를 두 사람이 나눈다.


완성된 카레를 보며 과연 이 소고기는 어느 시점에 발견하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그 풍미를 놓쳤는가, 놓치지 않았는가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아무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소고기 보관, 소고기 상태, 소고기가 상하면, 등의 검색어를 입력해보았다. 대략 색과 냄새, 질감으로 구분하라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머뭇거리다가 밥이 완성됐다는 밥솥의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라도, 좋고 값비싼 고기를 사 왔더라도,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한 고기임은 분명하니 아이들을 먹일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후다닥 냉장고 재료를 꺼내어 된장국을 끓이고, 간단한 반찬을 꺼내 밥을 차렸다. 카레를 기다렸던 아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니, 고기만 빼고 먹으면 안 되는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고기에서 우려난 물이 같이 끓여진 것이라 탈이 날 위험이 있으니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아쉽지만 이따가 다시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다행히 아침을 맛있게 잘 먹어준 아이들이 식탁을 떠나고, 차를 한 잔 마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글을 읽어서 중용이 무엇인 줄도 알고 어떤 숙성의 기간이 충분히 지나 맞이하는 적정 시점이 중요한 것도 알겠는데 그것을 알아채는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면 확신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여기까지만 하면 돼’, ‘아니 조금 더 해야 해’ 하고 마음속 갈등을 정리하고 타이밍을 확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언제가 적당한지, 어떤 것이 가장 충분한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오늘 그 시점을 놓쳤는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분주하게 만든 카레 한 냄비를 흘려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음식 보관에 신경 쓸 것.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일찍 제외시킬 것.

아깝다고 괜한 일을 만들지 말 것.


오늘 아침을 돌아보며 이런저런 다짐을 해 봤다. 오늘 그 소고기가 피딴처럼 숙성의 적당한 시점이었을지 아닐지 모르나 나는 그 시점을 알아챌 능력이 없었으므로 ‘만든 카레를 그냥 먹거나 야채 카레라도 만들 것을’ 하는 후회는 그만해야겠다. 고기 상태도 파악 못하는데 나는 언제 적당하게 숙성이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은 너무 심오할 것 같아서 덮어두기로 했다. 이제 그만 카레를 멀리 보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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