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떼, 풍선, 아이들, 솜사탕.
이 일차원적이고 직관적인 행복은, 대놓고 즐겁기를 강요받는 설명도 해석도 필요없는 종류의 것으로, 이 공간이 진부하고 따분해지는 순간부터 어쩌면 - 권태, 무심, 관성, 공백, 거리, 망각 따위의 것들이 삶을 침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세호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솜사탕 기계 앞에 멈춰 섰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회전봉이 설탕을 감아올린다. 가느다란 실들이 점점 부풀어올라 핑크색 구름으로... 투명한 기계 너머로 수빈이 보인다. 햇빛이 눈부셨는지, 그녀는 휴대폰을 조금 치켜들어, 화면을 가리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올라가 있었다. 솜사탕 기계가 짤깍, 소리를 냈다. 도세호는 감겨 있는 솜사탕을 막대째 받아들고, 뒤에 서 있던 아이에게 건넸다. 망설임 없이 벤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 또 그새끼랑 연락해?"
"그새끼?"
"대놓고 그새끼랑 연락하는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
"우리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어. 이부분은 터치 안하기로 했잖아."
"우리 사생활에 니들이 침범하는거지, 내가 터치하는거냐? 너 나랑 연애하는 중이잖아."
"그냥 연락 확인하는 것도 안돼? 그럼 몰래 연락할까?"
"그니까 왜 이런식으로 섞여야하냐고, 우리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면 최소한…"
"어디까지가 섞이는건데? 지금 내가 연락하는 사람이 만약 재욱씨가 아니였음 어땠을까? 내가 휴대폰으로 누구랑 연락만 주고받아도 이렇게 의심부터 하는거, 나 이제 숨 막힐 것 같아."
도세호는 두 장으로 이어진 얇은 가죽 지갑을 연신 접었다 폈다. 메종 마르지엘라. 제작년, 가인영이 그에게 1주년 기념으로 선물했던 것이다. ‘메종’—프랑스어로 ‘집’. 그들에게 약속된 미래와 같았으며 여전히 메종의 "종(son)"이라는 마지막 음절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수빈아."
"그... 오빠, 내가, 저 쪽에서 되게 맛있는..."
"우리 그만하자."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는 3통 가량의 미확인 텔레그램 메세지가 도착해있었다. 벤치에 등을 기대어 화면을 잠시 껐다. 목을 뒤로 젖히자, 뻐근한 어깨를 타고 찌릿한 통증이 혈관을 따라 퍼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코 바로 위로 닿을 듯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얇은 바람이 일었다.
풍경이란 참으로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우리가 정지하면 풍경이 흐르고 풍경이 정지하면 우리가 흐른다. 도세호는 덜컹이는 버스 한 칸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아, 구름에 해가 가렸다가 나타났다 하며 눈을 괴롭히는 것을 참을성있게 응시했다. 그동안 수빈에게 총 5통 가량의 전화가 왔다. 도세호는 카톡창을 띄웠다. 빨간색 숫자 '1'이 계속 말풍선 위에 남아 있어 늘 거슬렸다.
가인영: 세호야… 잘 지내? 나, 취직했어. 재택으로 돈도 벌고 독립해서 자취해. 우리 옛날에 참 좋았는데.. 나도 자취한지 이제 세 달 정도 넘어가네.. 밤에 혼자 침대에 누워있으면 마음이 되게 이상해. 나, 가족들보다 너 생각이 더 많이나.
똑, 똑, 발톱을 깎는 인영의 귀에는 외부소음을 차단하는 최신형 에어팟이 꽂혀 있었다. 에어팟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오갔다. 방바닥에는 온갖 서류와 노트북, 커피 컵, 젤네일, 파츠들, 뚜껑이 닫히지 않은 온갖 종류의 화장품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에탄올 냄새가 방안을 진하게 채웠다.
"예, 예… 그건 오늘 안에 업로드 가능할 것 같아요. 예예.. 음.. 그 상품은 떼오려면 프랑스 본사로 바로 연락이 가야할텐데요? 지금 당장 해야한다고요? 그걸 지금 말씀하시면…. "
그녀는 책장에 꽂힌 “프랑스어 첫걸음" 이란 책을 응시했다.
"제가.. 사실… 옛날에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1년 정도 했거든요. 본사 측에 메일을 보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네고 가능하면 말씀드릴게요. 아 그 그 그럼요, 당연하죠, 확실합니다. 네, 네, 들어가세요, 서류 보내드릴게요."
그녀는 에어팟을 바닥에 내동댕이 친 뒤 “프랑스어 첫걸음” 책을 꺼내 촤르륵 넘겼다. 이윽고 챗gpt를 켠 뒤, 문서 사진을 찍고, 복사하고 붙여넣었다. 그 다음 “본사에 보낼 해당 서류를 프랑스어로 번역해줘” 라고 입력한다. 그 순간, 카톡! 알람이 울렸다.
도세호다.
"취업 축하한다."
휴대폰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전하네. 톡보낸지 3일만에 ...-인영은 -너 그 회피형 지긋지긋하고 피말려서...- 라고 입력하다가 멈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쳐 쓴다.
"날 신경 쓰긴 쓰네..?"
그녀는 답장을 기다리게 하는 그의 패턴에 더이상 적응할 이유가 없었다. 노트북에 시선을 돌려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처리해야할 업무가 밀려있어 집중을 해야만 한다, 그 순간,
"잠깐 만날까?"
"지금 어딘데?"
인영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뭘 또 여기까지와.. 너 지금 자취 어디서하는데? 재택근무라며, 그 근처 까페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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