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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테노-알토 알디제1

by 불친절한 은자씨

또 한 학년이 끝났다. Year 10, Year 9 였던 두 녀석이 더없이 애썼던 한 해였다. 이제 2달의 긴 여름방학의 시작이다. 한참 전부터 한국행 티켓을 알아보았지만, 작년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가격에 당췌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다섯 식구가 왕복 1000만원을 감당해야 하더라. 목빠지게 한국을 가기만을 고대했던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깨끗하게 마음을 접자 오히려 휴가 계획을 세우기가 수월하다.

갑자기 훅 더워진 날씨에 산으로 떠나기로 한다. 산하면 돌로미티지 싶은 마음에 검색을 했더니 이런 이미 80% 예약이 꽉 차 있는데다 가격 또한 너무 올랐다. 그래서 검색 범위를 좀 더 넓게 설정해서 트렌티노부터 볼챠노에 이르는 지역까지 훑어본다. 매의 눈으로 본 결과 트렌티노 지역의 val di sole 마을에 수영장 딸린 레지던스 호텔이 걸려들었다. 3박4일에 조식 포함 540유로라는 환타스틱한 가격이다. 집에서 3시간 30분 거리니 나쁘지 않다. 얼른 예약을 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다음 날 아침 , 월요일이라 출근 길 시간을 피해 10시정도에 집을 나섰다. 숙소까지 200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국도를 타야하는 거리가 길고 트렌티노 지역에 가까워지자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야해서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이제 20분만 가면 숙소도착인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타고 있으니 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막내도 안색이 좋지 않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보이는 마을에 세워두고 도로가에 있는 핏제리아에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아무래도 산속 동네에 들어서면 고기 베이스의 음식이 많은데 보통 사슴고기나 멧돼지 고기 요리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곳 식당에서도 tagliatalle alla cervo가 있다. 점심이니 간단하게 파스타와 피자를 시키고 서둘러 빈 속을 채운다. 거의 식사를 마칠 무렵, 갑자기 우루루 쾅쾅 하는 소리와 소나기가 마구 쏟아진다. 안그래도 여행기간 동안 비예보가 매일같이 있어 걱정하던차였는데...

다행히 비는 금방 그쳤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호텔은 바로 앞에 개천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길고 큰 하천이 흐르고 제주도 오름 정도의 산을 앞 뒤로 두고 있었다. 제법 깊은 산 속이라 도시의 무거운 매연이나 먼지냄새가 공기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배정받은 숙소를 들여서니 군더더기 없이 투룸에 주방이 딸린 레지던스이다. 사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우리는 일반호텔보다는 이렇게 레지던스호텔을 선호한다. 간단하게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고 보통 투룸이 많아 공간을 나누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3시경에 도착했지만 비예보도 있고 감기기운에 오래 운전한 남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수영이나 하며 첫 날을 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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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마을의 모습(좌), 우리 숙소 앞의 전경(우)


이탈리아는 북쪽의 알프스 산맥이 피에몬테지역부터 알토아디제 지역까지 걸쳐있고 아펜니노 산맥이 위 아래 방향으로 있어 영토의 많은 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보통 돌로미티라고 하면 알페디시우시 나 세체다 쪽의 오르티세이 지역이나 트레치메가 있는 코르티나 담페죠 지역을 생각하지만 사실 돌로미티는 2,000-3,000m에 육박한 봉우리의 고산들이 연이어 있는 트렌티노부터 볼챠노, 알토-아디제에 이르러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까지 이르는 굉장히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산맥을 지칭한다.

위에 언급한 지역이 사실 개발이 잘 되어 있어 접근도 쉽고 여름철은 하이킹이나 트레킹을 위해서 겨울철은 스키를 위해서 관광객들이 전세계에서 찾아온다. 하지만 워낙 많이 알려져있어 숙소등의 비용이 비싸고 더이상 느긋한 관광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산들은 높은 봉우리와 더불어 멋진 장관을 보여줘 매해 여름마다 찾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일기예보를 확인해 본다. 오후부터 비 예보가 있어 아침일찍 서둘러 Lago dei Caprioli를 보러 향한다. 아직은 성수기 직전이라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지않아 여행 내내 한적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밀라노 주변은 한시간 거리에 꼬모호수나 이제오 호수, 가르다 호수, 마죠레 호수 등 많은 호수가 있다. 이런 바다만큼 큰 호수만 보다가 반대편이 한 눈에 보이는 호수를 보니 우습게도 진짜 호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대에서 그래도 유명한 호수인지 아침이어도 우리처럼 호수를 보러 온 관광객이 꽤 되었다. 호숫가 둘레의 침엽수가 호숫물에 그대로 비추는데다 도시에서 들리지 않던 다양한 새소리까지 들리니 휴가 온 기분이 제대로 든다. 슬렁슬렁 한 시간 채 안되게 걸었을까, 호수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이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cascata-폭포를 보러 움직였다.

IMG_6494.JPEG Lago dei Caprioli

지도에 폭포까지 트레킹의 어려움의 정도가 1단계로 표시되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30분 걸으면 바로 도착할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초입에 넓었던 트레킹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언덕 하나를 넘어가자 경사가 급해지더니 겨우 한 명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지는게 아닌가. 구름한점 없으니 25도의 날씨에도 햇살이 꽤나 강렬해서 아이들 등줄기는 이미 축축하다. 호숫가처럼 가벼운 산책이라 생각했던 둘째 딸은 1시간이 넘도록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가자 이미 입을 꾹 닫은지 오래다.

"이제 그만 올라갈까? 경사가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더니 막둥이가 여기까지 왔는데 왜 돌아가냐며 조금 더 올라가자고 나를 다독인다. 머쓱해진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반드시 운동을 다시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어디선가 콸콸콸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흐르던 개울물의 유속이 점점 가팔라지더니 조금 더 올라가보니 폭포의 아랫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땅이 축축해지고 공기중에 물방울들이 흐트러지는게 보인다. 큰 애와 막내가 서둘러 먼저 올라가더니 폭포가 보인다고 손을 흔들어준다. 무릎이 아픈 남편은 더 오르지 못하고 둘째와 돌바닥에 앉아버린다. 끙차, 나는 좀더 힘을 내본다. 5분정도 더 걸었더니 갑자기 폭포가 눈 앞에 펼쳐지는게 아닌가. 제주도에서 보았던 정방폭포와는 다른 느낌이다. 한참동안 산을 오르고 난 뒤 보이는 폭포여서 그런가 개운한 기분이 든다. 천둥소리처럼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폭포물이 시원하게 뿜어져 내려온다.

이 모습을 보던 막둥이가 한마디 한다.

" 엄마 보세요. 고생하고 여기까지 오니까 이렇게 멋진 걸 볼 수 있는 거에요"

이런 말을 하다니 내 막둥이 언제 이만큼 자란거야. 이 말은 아마 평생 내가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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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cata의 모습과 우리가 걸어내려간 등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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