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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 세비야

여행은 마법이다

by 불친절한 은자씨

부스럭대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남편이 어딜 다녀왔는지 백팩을 내려놓고 있다.

“ 언제 일어났어?”

남편이 싱글싱글거리더니

“ 알함브라 궁전 예약하러 일어나서 갔다왔어. 궁전 내부 입장은 못 구했고, 헤네랄리페 정원 티켓만 간신히 끊었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 우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남편이 혼자 티켓 끊으러 다녀왔다니 참 기특하다. 두 꼬맹이에 배불뚝이 아내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려니 나름 고생이 많다. 이른 나이에 주재원으로 나와 정말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7년 세월을 버텨낸 남편이 새삼 대단하다 싶다. 이렇게 혼자서 고군분투한 노력이 있었으니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겠지.


아침이라고 하지만 이미 해는 중천이고 성난 더위의 기세가 대단하다. 입장시간이 11시이라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애매해서 궁전 내부에서 먹을 구 있는 간단한 샌드위치를 싸가기로 했다. 마침 써브웨이가 있어 애들이 먹을 만한 걸로 두 어개 사서 가방에 넣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약간 높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는데 궁전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굉장히 넓다. 그 안을 아이들과 둘러보기에는 사실 무리였다. 이 곳은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세운 것인데 시간이 흘러 스페인이 기독교의 영향이 커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자벨여왕과 카를로스 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영향이 이 건물에도 반영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의 인공연못이며 조경이 얼마나 섬세한지 그 시대의 감각에 감탄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원 내부의 건물안으로 들어가니 포스토이나 동굴 속에서 봤던 종유석같은 장식의 기둥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슬람양식하면 떠오르는 타일의 세공이나 청색과 희색의 조화가 기각막히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눈이 가는 모든 곳이 섬세하고 화려함 자체여서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두 꼬맹이들은 놀거리가 마땅치가 않은데다 소란스럽게 뛰어다니질 못하니 갑갑할 뿐이다. 언제 나가냐는 말을 십분에 한번씩 한다. 이거 좀 봐바. 옳지 여기서 사진 한번 찍자. 이거 예쁘지? 여기 또 올 수 없으니까 눈에 잘 담아둬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그래 알함브라 궁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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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 내 헤네랄리페 정원(좌) 궁전에서 내다 본 그라나다 마을 모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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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모습과 아이들

아이들은 좀 지나면 스페인에 이런 곳에 와 봤다는 것도 기억 못 할 텐데 나와 남편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쉽다. 얼마나 커야 이런 곳을 엄마 아빠랑 여행 다녔다고 기억할 수 있을까. 중학생은 되어야 그 기억이 오래 갈텐데..한편으로는 나와 남편도 이제서야 이런 곳을 와봤는데, 아이들이야 아직 기회가 많겠지..그렇게 달리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 이런 여행은 어쩌면 전혀 즐겁지 않겠다. 오랫동안 차를 타고 겨우 더위를 참고 간 곳이 성당이나 궁전이라니. 놀이터나 모래해변이 더 낫지 않겠나? 솔직히 이런 곳을 온다는 것은 어른인 나와 남편을 위함인 것이지. 나중에 아이들에게 기억도 나지 않을 이곳을 사진첩을 보여주며 "자, 봐바. 너희 어렸을 때 이런 곳도 다녀왔다구."하며 이날의 추억을 옛날 이야기 하듯 늘어놓을 요량으로 온 것이다.


지금도 남편과 내가 이 여름의 여행을 회고할 때면 꼭 빠지지 않는 것은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을 때이다. 별로 크지 않은 무대가 있는 식당겸 공연장이었는데 세비야하면 떠오르는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곳이었다. 세비야에는 이런 곳이 여러군데 있는데 공연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잘 알아보고 관람하는게 좋다. 세비야도 그렇고 스페인의 여름은 워낙 덥기 때문에 시에스타가 끝나고 저녁장사를 하는 곳은 8시 이후에나 영업을 한다. 당연히 이런 공연장도 밤 늦게 공연을 하는지라 우리는 10시 공연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둘째 딸이 잠자는 시간이라는 것. 플라멩코의 공연이 시작되고 남녀 무용수 대여섯명이 올라와 탁탁탁 거리는 스텝을 밟으며 현란한 춤을 시작했다. tv에서 봤던 것과 달리 무대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공연을 보니 무대 마룻바닥을 밟는 스텝소리가 굉장히 커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 했다. 이렇게 큰 소리 속에서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딸은 잠이 들었다. 몇 분 안자고 일어날거라 생각했는데 딸은 숙면을 취했고 공연이 끝나고 무용수들이 외치는 소리에 잠이 꺴다.

남편과 나는 이 사건을 스페인 얘기가 나올 때면 잊지않고 아이들에게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그 때말이야. 그렇게 시끄러운 공연장 속에서도 윤하가 얼마나 피곤했던지 그냥 곯아떨어졌어"

남편은 플라멩코 댄서가 쾅쾅거리며 마룻바닥을 휘저었던 것까지 흉내내며 그 때의 시끄러움을 한껏 보여준다. 그러면 딸은 깔깔거리며 생각나지도 않는 그때를 떠올려보려 하고 우리 부부는 그때를 아름답게 추억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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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플라멩코 클럽(좌), 세비야 골목에서 나(우)


여행은 떠나기 전 가장 설레이고 즐겁다. 어떤 장소를 갈 것인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 가서 어떤 것을 해 볼 것인지를 계획하는 그 때가 아마 제일 기대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행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계획하지 않았던 지점에서 벌어난 사건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런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 많이 벌어지게 된다. 그 당시에는 왜 내가 사서 이런 고생을 하나 싶지만 결국 시간이 지난 뒤 내 기억 속에 남는 것은 모두 그런 일들이다. 힘들고 괴로웠던 여행도, 기대보다 더 즐거웠고 행복했던 여행도. 우리 가족이 두고두고 서로 끄집어 얘기하며 같이 보내 그 시간을 뒤돌아보게 하는 마법이 여행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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