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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알리칸테, 그라나다

by 불친절한 은자씨

스페인 남부의 여름은 덥다는 말로는 그 더위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40도를 가볍게 넘기는 데다 제발 이젠 해가 졌으면 좋겠다싶은 말이 나올 만큼 낮도 대단히 길다. 밤이 되어도 워낙 오랫동안 해가 떠 있던 탓에 그 열기는 쉬 가라앉지 못한다. 한국의 겨울이 정신이 번쩍 뜨일 시리고 아린 쨍한 추위이듯, 스페인의 여름은 습하지는 않지만, 워낙 높은 온도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더위이다.


2013년 여름, 남편은 그 해 말 귀임발령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넘어온 지 3년 차 되던 해였다. 그 당시 나는 셋째를 임신한 사실을 안 지 얼마 안되었고, 셋째는 한국에서 낳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남편의 귀임 소식은 반가웠다. 유럽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과감하게 8월 여름 한 창 때 스페인 남부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아니면 긴 휴가를 가는 것도 힘들고, 언제 다시 스페인을 올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목적지는 가장 스페인다운 곳,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그곳 그라나다와 세비야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진첩을 들춰보면서 추억에 잠기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누군가 8월에 이곳을 여행간다고 한다면 나는 솔직히 뜯어말리겠다. 임신 5개월 때에 접어들었던 때였는데 셋째여서 그랬는지 내 배는 생각보다 빨리 불러 오른 상태였고 6살,4살짜리 두 꼬맹이를 데리고 한참 더운 8월을 관광하러 돌아다녔던 그야말로 극. 한. 체. 험 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니 깊숙한 곳에 있던 그 당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900km가 넘는 그라나다까지 하루만에 가기는 무리여서 중간지점으로 알리칸테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바르셀로나는 세련되고 부유한 휴양도시 같은 느낌이라면 알리칸테는 바닷가 도시임에도 좀 더 소박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로컬느낌이었다. 구시가와 바닷가 주변을 돌아보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castillo de santa barbara -카스틸요 산타 바바라-에 올라갔다. 약간 오르막길이었지만 오랫동안 차를 탔던지라 올라가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다. 높지 않은 언덕에 위치했는데도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화창하면 더 장관이었겠다 싶었다. 흐린 날씨가 아쉽다. 이 성은 9세기 이슬람교도들이 만든 성으로 스페인에 이슬람문화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유적이었다. 그저 스쳐지나갈 요량이었던 알리칸테에서 이런 기대치않은 명소를 보다니 행운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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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illo de santa barba 위에서 바라본 Alicante 모습


다음날 그라나다를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또 달렸다. 해안가를 벗어나 스페인의 내륙으로 들어가니 바닷가와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다. 스페인의 중부가 그렇게 메마르고 허허벌판일 줄이야. 영화 속 미국 서부 지역처럼 군데 군데 선인장같은 키 작은 식물들만 있을 뿐 황폐함 그 자체였다. 4시간 가까이 달리고 나서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일년내내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위해 그라나다를 찾는다고 하지 우리도 얼른 매표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미 당일 표는 오전에 모두 다 팔린 뒤였고 궁전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바꿔 그라나다 카테드랄을 먼저 보러 갔다. 유럽 어느 도시든 카테드랄이나 두오모가 제일 명성이 높고 화려한데 이곳 그라나다도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 모스크를 허물고 지었다고 하는데 이슬람양식과 고딕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굉장히 화려하면서 우아한 건축물이었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경제적 부를 누렸던 국가의 건축은 그 화려함이 남다르다. 현재와 달리 과거 스페인이 제국이었던 시적,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는 카테드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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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카테드랄의 내부(좌),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전경(우)

카테드랄에서 나와 우리는 알함브라 궁전의 전경을 잘 볼 수 있다는 니콜라스 전망대로 올랐다. 야경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아이들과 저녁 해 질 시간까지 밖에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는 알함브라 궁전을 본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따라가면 바로 도착하는 곳인데 입장료도 없는 대신 저 알함브라 궁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다. 난간이 생각보다 낮아 좀 위험할 수 있는데 그래도 저 궁전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은 찍어줘야지.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데 바로 앞에 작은 분수가 있어 아이들이 한참 신나게 논다. 역시 아이들은 저런 궁전이 대수겠냐. 뙤약볕에서 이런 분수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계획대로 알함브라 궁전을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내일 어떻게든 해봐야지 싶다. 온라인 예약을 안했더니 아침일찍 당일 표를 구할 수 밖에 없단다. 아이들과 정신없이 내려오느라 티켓을 예약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쉬지만 어쩌겠는가. 내일 아침 시도해보고 안되면 포기하는 수 밖에. 게다가 지금 40도가 육박한 날씨이니 더 이상 밖에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이제 숙소로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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