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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좌충우돌 혼돈의 기억

by 불친절한 은자씨

한참 자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깨웠다.

" 얼른 일어나봐, 비행기 취소됐어"

꿈인가 싶었는데 비행기 취소되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 뭔 말이야, 취소라니?"

베게 밑에 두는 핸드폰을 찾아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어가고 있다. 평소같으면 일어나기 힘든 시간이지만 비행기 취소라는, 정말 아닌 밤 중에 웬 날벼락인가 싶은 소리를 들으니 몸이 용수철마냥 절로 튀어오른다.


거실로 나가 남편이 보여주는 메일을 읽어보니, 정말 웬걸 비행기가 취소되었다.

말도 안된다. 당일 첫 비행기 취소를 이 시각에 이렇게 메일로 보낸다고? 경위를 보니 공항에 드론이 출몰한 사건 때문에 Gatwick 공항이 마비가 되어 그 여파로 취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다. 가지말까? 보아하니 비행기표 환불도 안될 것 같다. 천재지변에 속하는 일이라나. 그렇지만 이대로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면 자그마치 로열석의 라이언 킹 뮤지컬을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 뮤지컬을 본다고 얼마나 기대했었는데 이대로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대체편 항공을 급하게 검색해본다. 비록 두 배이상 비싸긴 어쩌겠는가. 타고 가는 수밖에.


공항은 마치 마법이라도 있는지 막상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의 그 난리통은 잊게된다. 공항은 이미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다행이 새로 예약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떴고 우리는 개트윅이 아닌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아이들 셋과 캐리어를 하나끌고 예약해둔 호텔로 갔다.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관광명소에서 멀지않은 곳에 좋은 가격으로 예약한 호텔이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어야지 싶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일까. 호텔 체크인을 하는데 남편의 카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제거부가 되는 게 아닌가.

이쯤되니 영국을 괜히 왔구나 싶다. 시간을 두고 다시 결제를 해도 계속 승인거부된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다른 카드로 해보지만 또 승인거부다. 뒤지고 뒤져 결국 내 한국 비자카드로 겨우 체크인에 성공했다. 영국은 정말 마법의 나라구나.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불운이 나한테도 일어나는구나 싶다. 이 모든것이 불과 6시간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하루가 정말 길다.


안타깝게도 5일간 런던에 머무는 동안 이 외에도 여러 불운이 계속 일어났다. 하다못해 런던 지하철은 왜 툭하면 멈추는건지. 우리가 목적지까지 지하철만 타고 도착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몇 정거장 못 가고 내려 걸어가거나 버스로 옮겨 타는게 일쑤였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어딜 가든 사람이 너무 많은데 아이들이 셋이다보니 혹시라도 놓칠세라 신경이 곤두섰다. 피카딜리 서커스거리, 코벤트 가든, 레스터 스퀘어 역 주변의 차이나타운, 타워브릿지 주변. 빼곡하게 사람이 밀집되어 있는 대도시였다. 눈이 닿는 모든 장소가 화려하고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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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화려한 밤거리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 맞다. 이런 북새통을 경험했으면서 다음 해 우리는 또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에 런던을 찾았다. 온갖 일어날 수 있는 불운이 설마 또 일어날까 싶었다. 게다가 런던 거리의 화려했던 크리스마스 무드가 다시 그리웠다. 그래 크리스마스는 런던이지.

그러나 또 사건이 일. 어. 났. 다. 이번에는 예약해둔 숙소가 우리 도착 전날, 화재가 발생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데 누군가 오더니 전날 밤 화재가 났다며 숙박을 할 수 없다고 다른 숙소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런던 시내에 왠만한 호텔은 예약이 힘들었다. 이쯤되니 다시 런던으로 온 우리가 한심했다. 아이들과 나는 그 숙소에서 나와 카페에서 남편이 숙소를 다시 알아볼 때까지 한없이 기다렸다. 두 어시간이 지나고 나서 결국 우리는 지하철 역이 다니지 않는 런던 외곽에 작은 레지던스를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사건들을 런던 한 곳에서만 겪은 통에 나는 런던하면 어떤 장소가 떠오르기 보다는 우리가 겪은 사건들이 기억에 난다. 원래 여행은 불확실성이 전제가 되지만, 이렇게 낮은 확률의 가늠조차 안되는 일이 일어나면 심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예상 시나리오에서 난이도 극상의 상황이 벌어진 곳이 런던이었다. 템즈강가의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보았던 감흥보다는 겪었던 사건들의 아찔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매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질 때면 우리 가족은 2018년과 2019년 겨울 런던에서 겪은 일을 꼭 식탁위에 올리며 그 떄를 곱씹게 되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에피소드 하나 생긴 셈이다. 비록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이고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던 여행이 크리스마스 저주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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