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을유문화사, 2013)
내가 만약 ‘뇌 헤르니아’ 같은 중증 장애아를 임신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 확률이 더 높은 심각한 장애라면 말이다. 그 아이를 위해서나 부모의 삶을 생각했을 때 딱히 답이 없음을 느낀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작품 속 ‘버드’처럼 아기가 쇠약사하기를 바라면서 낙태전문의에게 유기하려했던 행태를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라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오에 겐자부로(1935) 일본 소설가. 도쿄대학 신문에 ‘기묘한 일거리’로 학생작가가 된다. 일본 자위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등 전후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라크 정부의 핵실험에 항의하여 일불문학 심포지엄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장남은 머리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동안 써온 작품 세계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그는 스스로 전후 민주주의자, 장애자의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갖고(p190) 사회운동을 펼친다. 노년에도 격변의 정치․경제․사회의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통 받는 이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끊임없는 집필과 강연으로 반전운동과 평화운동을 해왔다.
작품 속 ‘버드’는 날지 못하는 새를 의미한다. 영국시인 W.H. 오든의 싯구 ‘이미 어린아이도 새도 아니니’에서 따왔다.(p191) ‘버드’는 자기의 처지에 맞는 적절한 사고와 행동이 부족한 인물이다. 아내가 분만실에서 출산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데 아프리카로 떠날 궁리를 하며 거리를 배회한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물이다.
실제로 신생아 백 명 중 4명이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기형아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유전요인과 돌연변이, 환경오염, 약물남용 등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사회의 다양한 병폐와 핵실험 리스크 및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인권유린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내 아내에게서 비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난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나는 아기를 대학병원에 맡겨두고 자연스런 쇠약사를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지.(p194)”
단순한 우연이란 유전요인이나 돌연변이를 비롯하여 환경오염의 결과로 빈발하는 자연재해, 재앙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라고 말하는 그를 무책임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이유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숙명적인 불행에 대해 인간은 한없이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담당 의사는 수술해도 식물인간으로 평생을 살아야할지 모른다고 한다. 이에 버드와 장모님은 노골적으로 아기가 죽기를 바란다. 버드는 아기에 대해 일말의 애정도 없고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다만 아내는 버드에게 아기가 잘못될 경우엔 이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종교단체에서 자매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두세 살 된 영유아부터 15~6세의 청소년까지 다양한 아이들이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아이들 생각이 나서 마음이 무거웠다. 태어나자마자 친부가 자식이 죽기를 바란다니 참담하다.
도입부에서, 버드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꿈을 꾸며 지도를 구하고자 번잡한 상가를 배회한다. 아내는 분만실에서 사투를 벌이는데 술병을 들고 대학 동기인 여자 친구를 찾아간다. 그녀는 낮엔 은둔한 채 밤에 활동을 한다. 버드는 그녀를 찾아가 술을 마시며 쾌락을 추구한다.
전개에서 뇌 헤르니아라는 장애를 가진 아기가 태어나고 아기의 생사가 결정되기까지 버드의 고뇌와 갈등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아기가 죽기를 기다리지만 아기는 수술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버드는 아기수술을 거부하고 낙태 전문의에게 아기를 맡긴다.
작가는 인물의 복잡한 정신적 편력과 갈등을 다각도로 묘사한다. 그런 구상에는 분명한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한 인간의 생명과 그 생사에 대해서 누구라도 쉽사리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 없이 심각한 장애아를 덥석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술이 잘 된다 해도 거의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한다했으니 말이다. 평생 보호자를 달고 살아야 되는 아이 자신이나, 그 양육자의 인생이 어떨 것인지 상상이 된다. 따라서 작가는 결말부분까지도 아기가 죽기를 바라며 낙태전문의에게 맡긴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다가 말미에서 갑자기 희망적인 휴머니즘으로 선회한다. 벼드는 아내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기쿠히코라 짓는다. 기쿠히코는 과거에 버드가 버린 적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가 경영하는 주점을 찾아가서 인간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매번 현실을 도피하여 달아나려고 했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p269),
‘이 세상에 거의 무의미한 존재 하나를 살아남게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히미코에게 ‘그건 나 자신을 위해서지. 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p272)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작가는 실제로 장남 히카리가 머리에 기형을 지닌 채 태어나면서 일찍이 없었던 심정적인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다.(p290) 그리고 이듬해 이 소설을 써서 출간한다.
인간이란 본인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또한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폭력에 휘둘리고 그것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망가질 수 있는 존재다.
전반부의 나약하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탈피하여 훈훈한 인간적인 결말로 이끈 것은 순전히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버드가 자기 피를 수혈해서 아기의 수술을 돕는 부분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한없이 나약하고 철이 없던 그가 달라진 것이다. 아기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게 되고, 병명은 뇌 헤르니아가 아닌 단순한 육종이었다고 밝혀진다. 이 부분은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의료사고다.
오랜 방황 끝에 버드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자낸 이번 불행과 정면에서 맞서 잘 싸웠군 그래’(p274)라는 교수의 말처럼 아프리카 풍토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버드는 아내의 믿음과 주변 가족들의 인내 속에서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성인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퇴원수속을 밟는 중에 아기를 안고 있는 버드에게 장인은 따뜻한 육친의 목소리로 말한다.
“자넨 변해 버렸어. 자네에겐 이제 버드라는 어린애 같은 별명은 어울리지 않아”(p276).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위대하고 숭고하다. 더구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고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아무리 양육권을 가진 친부모라 해도 타자의 생명을 함부로 훼손할 순 없다. 숨이 붙어 있는 생명은 어떤 경우라도 방치하여 죽게 해서는 안 된다.
결말부분의 비약적인 스토리 전개가 당황스러웠지만 희망적인 마무리라 마음은 홀가분했다. 나아가 작가의 의도는 좀 더 깊고 심오하다. 장애아의 기형을 소재로 삼아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 지구 전체가 앓고 있는 환경문제이다. 과도한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환경오염과 이상기후 현상을 말한다. 안전지대가 없어진 지진, 홍수, 태풍 등 심각한 자연재해, 지구상의 대재앙에 대한 경고다. 따라서 핵 실험이나 핵 오염수 해양방출 등에 대한 문제를 재삼 심각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