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낙상홍을 보니 왠지 고즈넉한 기분이 듭니다. 아직 날씨는 선선하고 바람은 잠잠하기 때문일까요? 멀리 까치 소리만이 아침의 정적을 깨트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제법 큰 키의 미국 낙상홍 가지에서는 깨알같이 돋아있던 꽃봉오리들이 후드득하고 터지듯이 피어나네요. 뭔가 힘찬 아침의 울림이 들리는 듯도 합니다.
연한 연두색의 꽃이 싱그런 느낌입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호흡하며 활짝 피어납니다. 초록의 잎 사이에 피어있는 꽃은 왠지 씩씩한 느낌이고 오른쪽의 그녀는 무엇이 즐거운지 활짝 웃고 있군요. 길게 늘어진 가지마다 꽃봉오리와 벙글어지는 꽃과 활짝 핀 꽃들이 가득합니다. 말갛게 피어나는 꽃 안의 꽃술에는 노란 꽃가루가 가득하네요.
잎 사이사이마다 작은 꽃들이 가득한데 봉오리째 떨어진 꽃송이는 잎 위에서도 피어나는 듯합니다. 하네요. 조금 다른 모양의 꽃도 피어있는데 안쪽에는 작은 씨방이 보입니다. 낙상홍은 암수딴그루라고 합니다. 수꽃에는 꽃가루가 많은데 암꽃의 꽃술은 흔적만 남아있군요.
맑게 피어나는 그녀들과 함께 아리아를 들어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중 아멜리아의 아리아 '이 어두운 새벽에(Come in guest’ora bruna)’가 상쾌한 아침 공기에 퍼지는 듯합니다. 소프라노 안야 하르테로스의 노래가 멋진 노래에 연두색 꽃들도 박수를 치는 듯 흔들려오는군요.
햇살이 더 나오기 전에 꽃봉오리가 가득했던 낙상홍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며칠 전에 새로 알게 된 그녀들의 마을로 말이지요. 이곳에도 활짝 피어있네요.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꽃들이 웃으며 반겨줍니다. 그런데 화사한 햇살을 받고 있는 연두색 잎에는 작은 솜털이 보송보송 나있는 느낌이 듭니다. 연두색 벨벳 같다고나 할까요? 하얀 꽃도 피어있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작은 꽃봉오리들이 이제 하얗게 활짝 피어있군요. 연두색 잎과 함께 산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곳에는 진한 자줏빛의 낙상홍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네요. 화사한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은 활짝 웃으며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듯합니다. 약간 그늘이 지니 붉은 색감이 더욱 진하게 보입니다. 잎 사이에 송골송골 피어있는 꽃들은 마치 다정한 가족 같습니다. 함께 보여서 뭔가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는 듯도 하고 나지막이 어떤 노래를 부르는 듯도 하고요.
그녀들의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요? 바라보기만 해도 뭔가 힐링이 되는 듯한데 노래까지 들으니 더욱 즐거워집니다. 문득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중 순진한 시골 아가씨 체를리나의 약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체를리나는 돈 조반니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약혼자 마제토에게 '만일, 원하신다면(Vedrai carino, se sei buonino)'을 부르며 약을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따라 소프라노 모이차 에르트만의 목소리가 야리야리하게 느껴집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작년에 본 낙상홍 열매들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지난가을에 붉게 아주 붉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겨울이 되어서도 가지에 남아 하얀 눈을 맞기도 했었네요. 지난 열매들은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새롭게 피어나는 꽃들은 새로운 열매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붉게 익어가겠지요. 그것이 자연의 순환이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꽃이 피어도 모두 열매가 되지 않고 열매도 다 잘 익어가지는 않는 듯합니다. 잘 익은 열매도 적합한 땅으로 돌아가야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우게 될 것이고요. 조금 슬프지만 이 또한 자연의 법칙이겠지요. 어쩌면 모든 것이 자연의 주어진 시간 동안에 기쁨과 의미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산책자는 부디 꽃들이 열매를 잘 맺고 또 새로운 생명을 키워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니 왠지 활짝 핀 꽃들을 안아주고 싶어 지네요.
같은 낙상홍이지만 각자 개성 있는 색깔로 피어나는 꽃들의 노래가 즐겁습니다. 그녀들의 노래를 들었으니 저도 답가를 들려주어야겠습니다. 아니, 같이 불러야 할까요?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 중에서 아리아 한 곡을 골라봅니다. 도피 중이던 아르투로는 어렵게 엘비라를 다시 만나 '내 품으로 와요(Vieni fra queste braccia)'를 부릅니다. 기쁜 마음으로 엘비라가 화답하는군요.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와 소프라노 니노 마차이제의 목소리가 강렬하네요. 햇살은 뜨겁게 비쳐오지만 오늘은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