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립니다.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비는 왠지 고마운 느낌입니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촉촉이 내리는 비는 초록의 대지를 적시고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합니다. 바람에 흩어지는 가랑비가 얼굴을 간지럽히는군요. 우산에서는 빗방울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비록 신발은 젖어가지만 왠지 발걸음은 가벼워지는 듯하네요.
흰 배롱나무의 꽃이 비에 젖어가고 있네요. 하얀 꽃잎과 연두색의 꽃봉오리 그리고 길게 뻗어 나온 꽃술의 노란 꽃밥이 초록의 잎들과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맑은 꽃향기가 미세한 물방울과 함께 점점 퍼져나가는 듯도 합니다. 배롱나무의 분홍색 꽃도 비에 젖으며 피어나는군요. 가지마다 붉은빛이 감도는 꽃봉오리들이 가득합니다. 이제 가지마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을 보게 되겠네요.
가지마다 주렁주렁한 낙상홍의 열매에는 빗방울도 가득 달려있습니다. 작은 물방울을 담고 있는 둥근 초록 열매들이 마치 웃고 있는 듯합니다. 또 다른 세계를 담고 있는 아래쪽의 커다란 물방울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네요. 빗물에 세수를 한 듯 깨끗한 초록의 열매들에서는 충만한 생기가 느껴집니다.
비를 맞고 있는 좀작살나무의 꽃들도 말간 모습이네요. 비록 비에 젖었지만 왠지 활기가 느껴집니다. 분홍색의 작은 꽃들에도 작은 물방울이 가득하고 긴 꽃술의 끝에는 둥근 물방울들이 담겨있군요. 왠지 빗물이 꽃이 된 듯도 합니다. 비에 젖은 나무 아래 화사하게 피어있는 분홍 꽃을 들여다봅니다. 그녀의 촉촉한 미소를 보게 되네요.
그런데 좀작살나무의 꽃은 벌써 열매가 되어가네요. 갈색으로 변한 꽃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연두색 열매들이 힘찬 느낌입니다. 이제 점점 커지며 초록이 짙어가고 언젠가는 보랏빛 보석이 되겠지요. 그 안에서는 씨앗이 점점 단단해질 터이고요.
이곳은 비비추의 작은 마을인가 봅니다. 연한 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연두색의 갸름한 잎 위에 가득 피어있네요. 바람에 살랑이는 꽃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꽃과 꽃봉오리도 빗방울을 담고 바람을 맞으니 시원한가 봅니다. 흔들거리는 미소와 함께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빗물에 씻긴 나무수국의 꽃들은 맑은 웃음을 보여줍니다. 다들 얼굴이 간지러운 듯 깔깔거리며 웃는 듯합니다.
초록의 잎 사이에 매실이 노랗게 익었네요. 앞쪽의 가지에는 아직 초록 매실인데 뒤쪽의 높은 가지에는 노란 열매가 가득 달려있습니다. 지난봄의 하얀 매화가 이렇게 노란 매실이 되었군요. 빗물의 리듬을 느끼며 천천히 걷다 보니 잘 익은 살구가 땅에도 비에 젖은 벤치에도 떨어져 있습니다.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지난봄의 화사했던 살구꽃을 떠올려봅니다.
우산 위에서 들려오던 빗방울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듯합니다. 이제 비가 그치려나 보네요. 여름 비에 촉촉이 젖어있는 초록의 잎들을 바라보며 여름은 여름의 멋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맑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도 보고 싶군요.
그런데 오늘 산책 중에 바람에 날리던 우산을 잡아주신 어느 동네 분이 다시 생각납니다. 그분도 꽃을 보러 나왔다며 꽃을 찍고 있는 산책자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기다려주시더군요. 잠깐의 인사가 전부였지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해야겠네요.
미세한 물방울이 가득 담겨있는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갑니다. 시원하네요. 멀어져 가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변주곡 18번'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로 들어봅니다. 맑은 피아노 소리가 마치 빗방울이 분홍색 꽃에 떨어지고 다시 초록의 잎에서 구르는 듯합니다. 마음은 점점 잔잔해지는데 또한 작은 파문도 밀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