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은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긴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어디론가 가려는 듯합니다.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살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도 불어옵니다. 무더웠던 여름이 쾌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간다고 하니 약간 섭섭하게 느껴집니다. 여름에는 여름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하여 찬바람이 불면 무더웠던 이 여름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흘러가는 구름에 햇빛이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아직은 열기가 담긴 무거운 공기는 낮게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늘 쪽에 늘어선 초록의 잎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에는 시원한 기분이 배어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색깔이 변하는 듯한 초록 잎 사이에는 열매들이 익어가고 초록의 수풀에는 여전히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멀리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제는 조금 낮아진 매미소리와 함께 들려옵니다.
해마다 그렇듯 낙상홍의 열매는 곱게 물들며 익어가는군요. 초록으로 커가던 작은 열매들이 노랗게, 주황으로 다시 빨갛게 물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색감을 보여주며 노래를 하듯 춤을 추듯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열매들을 바라보며 산책자도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보게 됩니다.
초록 잎이 가득한 나뭇가지에는 가는 연두색 덩굴들이 서로 엉키며 이리저리 뻗어가고 있습니다. 박주가리의 어느 줄기는 마치 허공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도 합니다. 가녀린 연두색 손을 흔들며 이제 떠나가는 여름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요?
커다란 초록 잎들이 늘어선 산책길에는 하얀 옥잠화가 피어납니다. 마치 옥으로 된 비녀 같은 꽃봉오리들이 부풀어 오르고 마침내 상큼한 향기를 내뿜으며 활짝 피어납니다. 바람을 타고 향기가 날아오는 꽃 사이로 걸으니 발걸음이 더욱 가뿐해지는 느낌입니다. 이 늦여름에도 이 계절을 좋아하는 꽃이 피어납니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모양과 색깔과 향기로 말이지요.
아직 지난밤에 내린 빗물이 남아있는 수풀에 보라색 꽃이 피어있는 닭의장풀이 뭔가 독특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부전나비가 앉아있네요. 누가 꽃이고 누가 나비인가요? 초록의 정원에는 작은 강아지풀들도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에 한가롭게 하늘거리면서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갈색으로 변해가는 강아지풀 은 작은 씨앗을 날리고 있나 봅니다.
초록의 꽃사과는 아직은 풋풋한 느낌이 드는데 뭔가 단단한 모습을 보니 이게 곧 붉어질 듯합니다. 마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남천의 열매도 계절을 알아차리고 붉게 익어갑니다. 바람에 살랑이는 초록의 잎도 이제 점점 붉어지겠지요. 산들 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야광나무 열매는 조금 더 붉어진 느낌입니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니 기쁜 마음에 발그레 해지는 것일까요? 그런데 아직도 꽃받침의 흔적을 달고 있기도 하네요.
선선한 바람만이 아니고 각각 개성 있는 색깔로 익어가는 열매들에게서 계절의 변화를 느껴봅니다. 그런데 가버리는 여름에서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다가오는 새로운 계절에 대한 기대감도 느껴봅니다. 이제 진하게 익어가는 열매들을 보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니까요.
나무 벤치에 앉아 초록의 단풍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색깔을 느끼며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 중 녹턴을 들어봅니다. 그해 여름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밤에는 또 어떤 꿈을 꾸게 될까요? 매년 왔다가 가고 다시 돌아오는 여름이지만 늦여름에는 늦여름의 기억이 있게 마련이지요. 부드럽게 들려오는 호른의 묵직한 울림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