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도수.
안 좋은 기억도 흔적 없이 가지고 날아가주렴.
내 아픈 마음도 씻겨주렴.
네가 가진 색은 투명이고
네가 담긴 병은 에메랄드 빛인데
너를 담는 사람들은 왜 암연으로 빠지는 것일까.
무서웠어도 강한 사람이었고
투박했어도 부드러운 내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투른 방식이었지만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자신이 주는 사랑으로 채우려 했으리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기억의 끝자락까지 가서 데려온 시작은 투명에 투명함을 담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물처럼 투명해서 물인 줄 알았고, 물처럼 마셔서 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부르는 이름은 물이 아니라 소주였다.
아빠는 나를 붙잡고 말했다.
"따라 해봐."
"소주 한 병 주세요"
"아빠 이름이 뭐라고"
"O자, O자, O입니다"
"그래, 점방에 가서 소주 한 병 주세요, 아빠 이름은 OOO입니다라고 말하고 오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네"
이름이 지폐가 되는 점방에서 그렇게 외상이 시작되었다.
점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진열된 과자가 보인다.
과자를 지나쳐 주인아주머니께 가서 아빠가 시킨 대로 말하고 돌아오는 내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있었다.
심부름을 완성했다는 기쁜 마음, 심부름을 잘했으니까 다음에는 점방 문을 열고 과자를 사들고 올 수 있겠지라는 희망.
희망은 꿈꾸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이때 배웠다.
일주일에 몇 번은 하루 건너 하루가 되었고 곧 매일이 되었다.
한 병은 소주 됫병이 될 때도 있었고 묶음이 될 때도 있었다.
심부름은 나에게서 동생들로 옮겨갔다.
대문 옆에는 포대에 가득 담긴 소주병이 트로피처럼 쌓여갔고 높이가 높아질수록 언성도 높아졌다.
아빠는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가 아빠이길 바랐다.
아름다움 속에는 치명적 독이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색 안으로 아빠는 숨어들고 싶었나 보다.
고단한 현실과 자신의 잘못된 선택들로부터 도피할수록 남겨진 가족들은 싸워야만 했다.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찌르고 살아남기 위해 또 찔렀다.
담벼락을 들이받아 부셨을 때도
아빠가 괜찮은지부터 살폈다.
이웃과 싸우며 길거리에 주저앉은 때도
아빠를 부축하며 집으로 모시고 왔다.
가로수 나무를 부러트렸을 때도
소식을 듣고 뛰어가기 바빴다.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걸을 수 있기만을 바랬다.
칼을 들고 다가왔을 때도
잠깐 악마가 들어온 거라 믿었다.
술과 얽힌 사건들 속에서 아빠를 집으로 데려올 때마다 아빠에게는 상처가 생겼고 우리에게는 아빠의 상흔이 옮겨왔다.
매일이 그런 날도 있었다.
현생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지옥을 살아가곤 했다.
아빠에게는 이유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이유가 없었다.
아빠는 혼자였지만 강했고 우리는 함께였지만 약했다.
글라스에 담긴 투명함에 자신의 얼굴이 투영되었다면 아빠는 과연 소주를 목으로 넘겼을까?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도 무엇이 급한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 또 일 년.
아빠의 시간을 함께 데리고 날아갔다.
그토록 바라던 것은 이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준 지옥 같은 시간을 데리고 날아가주는 것이었는데.
외로운 사람들은 술을 찾는다.
목 넘김이 시작되면 나오는 첫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쓸쓸하고도 고요하고 짧은 외마디.
그 노래에 누가 답해줄까?
아빠를 채운 도수는 어느새 바다를 이뤘다.
이젠 그 바다를 고요히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에 쓸쓸함이 가득하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슬프고 슬퍼서 소주를 닮은 눈물이 흐른다.
에메랄드 빛 병에 눈물을 담아 잔을 채우고 비우면 되돌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흘린 눈물이면 돌아왔어야 하는데 아직도 기약이 없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