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정해진 프로세스는 아니지만 미팅 초에는 가족 관련해서 여러 질문을 한다. 이는 주변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고 의외로 다양한 소스를 발견할 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객을 위함이다. 파트너라든가 자녀들의 상황 등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물어보고 또 답을 듣는다.
박 이사는 딸아이가 변호사가 되었으면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클에 진학해서 변호사 자격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박 이사의 생각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아이에게 아직도 꾸준하게 “법학서 좀 봐라”라고 외치는 아빠,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대학생 딸은 지금 3학년이다.
지난주에도 딸아이와 한 바탕 격전을 치른 후 미팅에 나온 그의 얼굴은 분노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커피 한잔 하면서 그의 딸아이 양육 스토리를 들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박 이사는 재학 중에 보기 시작한 사법시험에 연속해서 실패하고는 졸업 후에도 2년 정도 시험에 몰두하다가 ‘법조인 포기’를 선언하고 기업 공채시험에 응시해서 지금의 회사에서 줄곧 직장생활을 했다. 나름대로 실적과 평판이 좋았고 동기들과도 잘 지냈다.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여 외동딸을 두었다.
박 이사는 회사일에 열중하는 게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에서의 일은 당연히 아내가 모두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은 딸아이에게 ‘최고’를 추구하도록 주지 시키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본 듯했다. 딸아이의 어렸을 때 그들 부부의 양육방식은 정말 대단했다. 유치원 때부터 외국인이 가르치는 영어학원은 기본이고 발레학원, 바이올린 학원, 미술 학원, 피아노 학원 등등으로 딸아이가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온갖 학원은 모두 섭렵하더니 고등학교에 가서도 입시 주요 과목을 줄곧 과외를 시켰다. 딸아이의 성적은 투입한 시간과 비용에 비해 형편없었다. 결과는 아이의 대학 입시의 실패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재수 삼수 그러고도 1년을 더 기다린 끝에 입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사이 박 이사의 부부는 아이의 긴 입시 준비기간 동안 서로 의견이 충돌하면서 정말 많이 다투었다고 한다. 딸아이의 사춘기를 애써 무시했던 아빠의 무심함과 엄마의 조바심이 합쳐져 딸아이의 청소년기에 가족 간에 서로 대화를 해 보지 못했던 시간, 고등학교 졸업 후 4년간의 입시 준비 기간의 그 긴 터널 속 딸아이와의 대화 단절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딸아이는 지금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전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점수 맞춰 간 것이니 건성으로 학교 다니고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단다. 아니 박 이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딸아이에게 영어 공인시험 이야기를 했더니 불 같이 화를 냈단다. 이유인 즉 “아빠가 내 인생에 왜 자꾸 끼어드느냐?” “몇 점이면 되느냐?” ”영어시험 점수가 있어야 인생이 행복해지느냐?” 딸아이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예전의 수용적인 모습과는 다른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 딸아이의 행동에 박 이사는 적지 않게 놀랐다. 딸아이는 “당신, 계속 말하시오”라는 태도였단다. “내가 얘를 이렇게 키웠나” 싶은 생각과 함께 집안에서 아이를 어찌 이 모양으로 놔두었느냐고 부인에게 따졌다. 그날도 박 이사는 부인과 아이 문제를 두고 부부싸움을 했단다.
박 이사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혹시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십니까?” 대답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변호사요” 다시 물었다. “혹시 아빠의 못 이룬 꿈을 보고 싶은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여자가 전문직으로 살면 좋지 않겠어요”라고 하면서 말 끝을 흐린다.
박 이사는 대학 동기 모임을 가면 주눅이 든다. 그들은 모두 잘 나가는 법조인이었고 자기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보니 신분의 차(差)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자기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딸아이에게는 나름 희망을 걸어보겠다고 "꼭 변호사를 만들겠다"라고 딸아이를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무엇에 흥미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녀의 성공은 곧 부모의 성공’이라는 우스개 논리를 믿고 싶은 아빠의 욕망은 딸아이와의 대화는 애초 관심 밖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에서부터 자율성이 존중받아야 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춘기 무렵에는 나름의 방식대로 부모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딸아이의 의지를 외면한 박 이사의 모습에서 이 땅의 보통 중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박 이사는 딸아이와 정서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름으로 인해 중년 남성들은 자녀와 유대 관계에서 갈등과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더욱이나 박 이사는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졌으면 하는 자신의 ‘성취의 꿈’을 대물림하려 하지 않는가. 물론 딸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섭섭할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은 인터넷이나 다양한 대중매체의 환경에서 지내온 만큼 지금 중년들의 사고(思考)와는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거나 재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박 이사의 스트레스는 외견상 일단 딸아이의 진로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 같지만 어쩌면 부인이나 아이 관계를 포함해서 박 이사 가족의 여러 내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염려되는 건 시간이 흐르면 박 이사는 가족 내에서의 위치가 크게 변경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지금 박 이사는 ‘실직’ 상태이기 때문이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추운 계절이 “훅” 다가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