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마라톤을 해본 사람은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 하나, 마(魔)의 구간이라는 단어다. 보통 35km에서 40km 사이를 말하는데 이는 엘리트 선수들도 힘들어하는 구간이다. 하물며 아마추어들은 이 구간에 들어서면 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마라톤을 처음 입문한 사람이나 몇 번이고 뛴 사람들 모두가 힘든 구간이다.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 차에 실려가는 사람도 많은 고통스러운 구간,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현 부장은 까마득하게 멀어져 간 동료들이 야속하다. 이제 막 30km 지점을 통과했는데 하프 지점부터 아프기 시작한 발바닥으로부터 또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그만 뛰라고..”. 2시간 30분 남짓 뛴 하프 지점에서부터 그는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너무 처음부터 속력을 냈던 건 아닌가? 100리 길을 뛴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나? 현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시 고민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그래. 이 정도는 이겨내야 해....”라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교외라 차량이 뜸하기는 하지만 도로에서 벗어나 보도 위를 뛰다 걷다를 반복하면서 오직 골인지점을 생각한다. 힘들다. 팬데믹 시기라 마라톤 대회도 없어 동호회에서 자체 설정한 코스를 뛰고는 있지만 명색이 풀 코스다.
사실 현 부장은 이번이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 첫 풀 코스 도전이다. 하프코스를 두 번, 그것도 3시간이 넘어 결승선에 들어온 것이 그의 마라톤 참가의 전부였다. 자체 마라톤이기는 했지만 풀 코스에 임하는 현 부장은 비장한 마음이었다.
거의 매일 같이 회사 일에 매달리며 힘들어하는 이 땅의 많은 셀러리 맨 중의 한 사람이었던 현 부장은 작년에 회사로부터 퇴사 권유를 받았다. 예전보다는 좀 더 나은 명퇴 조건이라 여러 날 고민하다 결국은 20여 년 지내온 직장에서 퇴직했다. 그의 나이 50세로 사랑하는 아내와 대학생인 딸과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 그가 퇴사 후 급격히 변한 환경에서 자신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았다. 함께 퇴사한 동료들과 앞날을 모색하려고 무던히도 뛰어다녔다. 이력서도 만들어 많은 회사에 지원해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무려 20개 회사. 낙심한 그는 술과 다시 친구가 됐다. 회사 다니면서 했던 회식 때 마신 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에서 밤늦도록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지역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집에 돌아온 현 부장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뜀박질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가을이면 열리던 학교 운동회에서는 곧잘 상품도 타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며칠 후, 현 부장은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여 그 그룹의 맨 뒤에서 뛰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거리를 늘려가는 재미는 물론 같이 운동을 하고 있는 회원들과의 교류가 좋았다. 정기적인 연습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현 부장은 6개월 후 동호회 자체 하프코스에 처음 도전해서 엄청난 충만감을 느꼈다. 그리고 계속된 하프코스 도전, 3시간을 넘겼지만 이제는 그에게는 기록이 무의미했다. 자신감이 빵빵했다.
처음 마라톤 동호회에 들어올 때를 생각하면 이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낙담 속에 신세한탄으로 술과 함께 보낸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는 정기적으로 동호회 모임에 참석하여 운동을 했다. 그야말로 어둠의 시간을 벗어나고 있는 현 부장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 구상도 했다. 내년 초 집 근처에 스포츠 용품점을 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팬데믹 시기라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나름 마케팅에는 자신 있다.
창업을 결정하면서 다시 마음을 잡은 현 부장. 모처럼 가을에 열리는 마라톤 공식 대회 풀코스를 뛰기로 했다. 설레기도 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준비하는 그는 요새 더 열심이다. 기록은 생각하지 않는단다. “오직 나아갈 뿐이라고”.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계절, 가을의 전설을 그리는 그에게 마(魔)의 구간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