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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Oct 22. 2022

삶이 말랑하지 않은 이들에게..

'나의 아저씨'와 건배


가끔씩 무장해제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평일의 일과가 끝나고 주말이 시작되는 때, 나에게 그 무장해제가 허락되는 시간이다.

한동안 그 시간도 못 가지다가 지난주에는  생각을 놓을 수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내어둔 맥주를 챙기고 이 날은 '나의 아저씨'에게 건배였다.


2018년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잘 없다. 회당 러닝타임도 1시간 30분, 16부작이라 정주행 하기에는 체력소모가 크다. 게다가 감정의 소모도 크다. 하지만 잊고 살았던 삶의 한 자락을 적시는 대사의 여운이 커서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나도 그러했다. 두 번을 봐서 새롭지 않은데 어쩌다 한 번씩 일상 속의 생각을 놓고 싶을 때 다시 켜본다. 8회 이후 부분을 보다 보면 한 권의 인문학 책을 읽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리모컨이 9회를 눌렀다.



박동훈이 동일을 찾아가 이지안 빚이 얼마냐하니 동일이가

"왜? 대신 갚아 주시게?"

"어 얼마야?"

"어디서 멋진 척이세요.

인생 말랑말랑하게 살아오신 거 같은데 그냥 가세요.

이제 알 거 아니야 그 애가 어떤 애인지.."

그리고 치고받고 결전을 벌인다.

지안이 둘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뛰어오다가 동일이 지안의 과거를 얘기하자 멈칫한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를, 

절대 몰랐으면 하는 사람에게 들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내편이 되어준다면 

나도 지안처럼 저런 울음이 나올 것 같다. 

길가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 수 있을 것 같다.


"인생 말랑말랑하게 살아오신 거 같은데.."

이 말에 다시 건배를 했다.

'나의 아저씨'는 인생을 말랑말랑하게 살아온 이들, 지금의 삶이 핑크빛으로 말랑말랑한 이들은 볼 필요가 없다. 거부반응이 느껴질 수 있다. 나는 거부반응이 없었고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또 몰입해서 본다. 내 인생은 말랑말랑하지 않았나 보다.






<불편한 편의점 2>에서도 불편한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말랑말랑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내면에 나의 모습도 보였다.


자갈치와 소주가 소울푸드인 취준생(취업준비생)은 목포에서 나고 자랐지만 회를 못 먹었다. 어릴 적부터 날 것의 비린 느낌과 물컹한 식감에 영 적응하질 못했다. 어른들의 채근은 그런 그녀를 더욱 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회 대신 자갈치를 사주었다.

고향이 부산인 나도 회를 못 먹었다. 집 근처에 회센터가 있어 회를 뜬 것을 찾아오는 심부름을 자주 하였으나 그것이 나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 또한 날 것의 비릿한 느낌과 물컹한 식감에 영 적응하질 못해 아직도 회를 즐기지 못한다. 나는 생선회 대신 새우깡이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지 않는 꼰대 오브 꼰대 아저씨도 삶이 말랑말랑하지 않아 매일 일과 후 불편한 편의점으로 간다.

한 남자 청소년은 부모님과 형의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있을 곳을 찾아 저녁식사 후 집 대신 불편한 편의점으로 간다. 편의점에서 오래 있을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투 플러스 원 상품을 산다. 그리고 편의점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유튜브도 보고 책도 읽는다.

불편한 편의점을 찾았던 이들의 삶이 차차 말랑말랑해진 것을 보고 나도 편의점에 가고 싶어졌다. 옥수수수염차도 사고 투 플러스 원이 적용되는 건 어떤 상품인지 찾아도 보고 어떤 도시락이 있는지 보고 먹어보고 싶어 진다. 

그러면 나도 점점 말랑말랑해질까? 






어제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파랬다. 순간 하늘이 저렇게 파란색이면 바다의 수평선과 하늘이 구분이 될까?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30분이면 가까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지만 갈 수 없었다. 나는 매인 몸이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며칠 전 월급을 받았다. 이 돈은 나의 시간과 몸을 맡겨두고 저당 잡히고 받는 돈이구나 싶었다. 나는 이 돈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돈이 간절히 필요해 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조심스러운 경우 없는 재수 없는 얘기라 죄송하다.

경황이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 나를 계속 찾고 필요로 하는데 무엇을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내 생각은 얘기할 겨를이 없다. 이 공간은 나의 대나무밭이라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둔다. 듣는 이 보는 이가 많이 없어 다행이다. 적고 나면 내 몸과 표정과 마음이 조금 말랑말랑해진다. 나의 삶이 말랑해지는 방법이다.


아들, 비교는 암이고 걱정은 독이야. 안 그래도 힘든 세상살이 지금의 나만 생각하고 살렴.
이곳에서 나는 숨이 좀 트였고, 지친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고, 묵은 생각을 꺼내 햇살에 말릴 수 있었다.
김호연 - 불편한 편의점 2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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