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 일정에 맞추어 백신 3차를 맞으러 집을 나섰다. 익숙한 길을 지나 좁은 골목을 피해 핸들을 틀었다. 무심코 접어든 곳은 그이와 갔던 한서병원 앞길.
2019년.
작은 내손을 두툼한 그의 손이 꽉쥐고 들어선 곳은 병원접수대였다.
마치 아픈 남편의 검진때문에 불안과 걱정스런 표정으로 따라온 아내같은 느낌이었다.
등치가 큰 그이는 등치답지 않게 건강염려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시간을 기다려 겨우 진료를 받았다. 마치 아내처럼 그이의 병증과 진료상황과 복용해야하는 약을 꼼꼼히 살펴묻고 병원앞 약국에서 6개월치 약을 챙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송정바닷가로 향했고 점심을 먹었다. 손잡고 바닷가를 거닐었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사랑했다.
그이의 목소리는 상당히 달콤하다.
허세섞인 자기자랑을 귀엽게 늘어놓을 때 섹시하다. 178cm의 키, 92kg의 거구지만 내겐 그냥 이뻐보이는 남자였다. 이니셜이 새겨진 그의 셔츠소매는 특히 더 멋지다.
헤어진지 1년이 다되어 가지만 그이가 그립다.
염색을 포기해서 백발이 되어버린 그의 머리카락이 창피한 게 아니라 같이 있을 땐 쓰다듬고 싶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그의 머리에 유일하게 나만 손댈수 있는 영역이어서 뿌듯했었다.
한서병원을 지나 남천동으로 향하는데 내 차 앞에 끼어든 그랜저 쥐색.
그이의 차와 똑같은 차종과 색깔이다.
심장이 덜컥, 보고픔 그리움 살짝, 번호판을 확인하니 아니어서 찰나의 실망스러움이 교차되었다.
사랑할 땐 고요한 듯 격정적이었으며
바라보는 그이의 눈길은 부드러우면서 끈적했으며
전화기 속 내남자인 그이의 목소리는 다정하며 냉정함이 공존했었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예민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심각해지고 시간을 갖자는 핑계의 결별통보를 내게 한 소심한 멘탈을 가진 성격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일상 속에 있었으나 일상이 되어버리진 못했다.
그의 삶 속에 머물러 있고 싶었지만 상처를 두려워하는 이기적인 그 남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나를 몰아냈다.
사실상 이별통보는 내가 했었다.
처음부터 힘든 사랑인 줄 알았었다.
이 남자가 내 마지막 남자겠구나 직감했다.
나없이 못살게 만들어버려야지.
그게 내 목적이었다.
만날 때마다 가정식백반 도시락을 싸서 그이의 입에 넣어주었고 정성을 쏟고 듬뿍 내사랑을 표현했고 사랑받았었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것이 순간의 격렬함 뒤에 남는 것은 그 사랑의 잔상의 아쉬움, 대수롭고 하찮은 일상을 이젠 그와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간격이 남아버렸다. 생판 모르는 남이 된거다.
남이었던 우리 둘은 사랑한다는 끈으로 묶여있다가 끊어질 것 같지않던 그 끈이 한순간에 끊어져 허무한 그 끝자락을 부여들고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다시 남이 되었음을 깨닫고 돌아서버렸다.
그의 첫 근무지 부근의 강원도 불영사를 늦깎이 신혼부부마냥 갔었다.
그 곳에 33살의 그이의 젊음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줄곧 그이의 무릎에 앉아 눈맞추고 이야기할 때만 그이와 나는 마흔 여덟 동갑이었다.
내 엄마 장례식 때 진한 감청색의 멋드러진 수트에
듬직한 등치로 절하고 자기이름을 씌여진 국화바구니를 먼저 보낸 그이.
그렇게 하던 맹세는 다 공중에 흩날리고 날아가버리고 없다.
참 부질없고 아무 쓸모없었던 시간들이었던가.
그러나
회색 그랜저 *193이 그립다.
희끗한 그의 머리카락이 그립다.
이니셜이 새겨진 그의 셔츠소매자락이 그립다.
엄마집에 왔어 자기야, 신랑 목소리 기억 잘해라,
헤어져도 내가 니 마지막 남자다 알겠나,
너도 내 마지막 여인이다, 껌딱지처럼 내 옆에 딱 붙어있어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그립다.
내차에 아직 붙어있는 다쓴 디퓨저를 버리지 못했고 답이 없는 그이의 카톡을 지우지 못했고 삭제해버린 전화번호는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고 그이가 준 핸드크림을 다 쓰지 못했고 그이가 선물해준 물건들이 아직 내 일상속에 버젓이 버티고 있다.
내가 사준 발리 서류가방을 아직 들고 다니고 있을까.
내가 사준 레노마 이불세트를 아직 덮고 자고 있을까.
내가 사준 이니셜 펜을 들고 다니고 있을까.
내가 입혀주는 셔츠와 바지, 신겨주던 양말을 기억하려나.
그의 일상에 내가 남아 있을까.
승질피워서 미안했다 각시야 하며 다시 돌아와준다면 한아름에 다시 그를 품어줄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엔 그이는 내 것이 아닌 인연인가보다.
내게 늦은 사랑은 마지막 사랑이 되어 버려
기나긴 겨울밤을 추억으로 나를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