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개그맨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잠깐 다녔던 회사의 내 부서에는 mbc 공채 개그맨 8기 출신인 김모씨가 있었다. 회사 행사 때마다 외부의 사회자를 일시적으로 부르기보다 적당한 월급을 주고 전속 mc로 고용을 하는 것이 더 저렴했기에, 회사는 그를 채용했다. 한 행사장에 그의 인맥으로 꽤 유명했던, 그리고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그의 동기 개그맨이 오기도 했었다. 그는 사무실과 행사장에서 항상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 그는 항상 술에 찌들어있었고 가끔씩 보이는 뒷모습은 고독해보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둔 이후로도 나는 그를 tv에서 본 적이 없기에, 아마 그는 속된 말로 여전히 뜨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을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이해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이해하려고 애쓸 수 있을 가능성이 조금 있다 정도가 맞지 않을까. 나 자신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하물며 남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남을 이해하려고 애쓴다는 건 무엇일까.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 성장배경을 알고, 그 사람이 현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뭔지 아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침묵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몇 마디의 대화 다시 침묵.” “이런 순간이 단층처럼 쌓이는 동안 생성되는 새로운 무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무늬 역시 어디까지나 내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소설 「개그맨」 속의 화자인 나는 개그맨 애인과 헤어진 후에도 tv에서 그를 계속 만난다. 나는 그가 필사적으로 치는 웃음 그물의 노력만큼 온몸을 던져 부딪혀본 적이 없다. 어항 속이 지루하고 괴롭다고 느끼면서도 그 어항을 벗어나기는 두려워한다. 나는 과거 그와 사귈 때 늘 그의 오른편에서 걸었기 때문에 그의 왼쪽 얼굴에 점이 있는 것도 몰랐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적극성이 부족한 여자다. 또한 사소한 수치심 하나까지도 깊숙이 간직하는 예민함을 지녔기에 자신을 팔아가며 다른 사람을 웃기는 그를 보며, 용감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스스로는 절대 그럴 수 없는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여자다. 대다수가 그렇듯 그녀의 내면에도 부자연스러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저울이 기울면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는 삶을 수십 년간 지속해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개그맨인 그가 마약 파문 사건 이후로 tv에서 사라져 버린 이후로도, 타국에서 여전히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낮춰가며 남을 웃기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의 진정한 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전환 수술도 불사한 키키를 만났을 때도 무덤덤해 보였다. 타국에서 1권이 없는 책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의 삶을 그녀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해한다는 말 대신 침묵이 더 많은 진정성과 편안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듯하다.
버드게이지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생의 1권을 들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키키의 노래를 따라 자신만의 인생으로 흘러들어 ‘감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노래 속에 담긴 각자의 패배를 공유하며 순수한 평화를 누린다. 그러나 유명한 개그맨이라는 줄에서 떨어진 그가 누렸을 평화는, 버드 게이지에서 모인 이들이 키키의 노래를 통해 누렸을 공유의 평화는 나의 몫이 아님을 그녀는 깨닫는다. 그녀는 어항이 깨져서 늙어버린 자신이 흘러나올까, 전전긍긍했다. 겉으로 보이는 무난함을 추구하며 내면의 저울에 충실했던 삶을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저울로 재느라 어떤 선택지에도 동그라미를 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인생이 낭비되어버린 것을 이제야 알아버린, 패배자들이 모여 있는 버드게이지의 누구보다 외롭고 비참하다는 역설을 깨닫고 있는 여자다. 결국은, 삶이라는 지난한 화두에서 누가 진짜 패배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