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고복수 선생의 노래 '짝사랑' 첫 소절이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으악새'는 하늘 나는 새가 아니라, 억새를 이르는 말이다.
아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으악새'는 억새가 아니라 왁새(왜가리)를 이르는 말이다.
그 새가 '왁새'인지, '억새'인지는 가사를 쓴 사람이 알겠지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으악새'는 억새의 방언으로 나온다.
으악새 볼 생각으로 산행을 시작했지만, 한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으악새는 커녕 비슷한 것도 안 보인다. 한참 더 시간이 흐르고, 정상 부근에 올라 드디어 억새를 만난다.
주인공이 꼭꼭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짠~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뒤늦게 보여 주는 광활한 모습이 너무 화끈하다.
산꼭대기에 생긴 이 거대한 억새밭은 화전민들이 남긴 유산이다.
산에 불을 놓아 밭을 일구고 농사짓던 땅이었지만, 그들이 떠난 후에 억새밭으로 변했다.
화전(火田)은 초목이 자라던 땅에 불을 질러 농토를 만들고, 그곳에 농사를 짓는 아주 오래된 농사법이다.
수풀이 자라던 땅은 토양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초목을 태운 재가 비료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물이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도 한 때 화전민이 전국적으로 수 십만 명에 이르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들어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제도적으로 화전 경작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1968년 울진 삼척 지구 무장공비 사건을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또 1970년대 들어 정선, 태백 등 주변 지역에 탄광이 생기면서 화전민들이 탄광촌으로 흘러갔다.
억새풀 사잇길을 걷다 보니, 언덕 아래로 싱크홀(sinkhole) 같은 커다란 물웅덩이가 보인다.
돌리네 가까이 가 자세히 살펴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똥그랗고, 물이 가득 차 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 오를 것 같은 모양이지만, 물이 넘친 흔적은 없고 수심이 꽤 깊어 보인다.
아무튼 산 꼭대기에 생긴 물구덩이가 신기할 따름이다. 지질학에서는 이런 것을 돌리네(doline)라 부른다.
'석회암 지표가 빗물에 녹아 땅이 꺼지며 생기는 현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민둥산에는 이런 돌리네가 12개가량 발달해 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발구덕 마을에서는 일하던 소가 구덩이에 빠지고, 집이 기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구덕'은 구멍이라는 뜻으로 돌리네를 의미한다. 발구덕 마을에 8개의 구덕이 있다.
'지질학자들 조사에 의하면 민둥산 지하에 물과 뻘이 고인 거대한 석회석 동굴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민둥산에서 거대한 석회 동굴이 발견되고, 종유석으로 가득한 동굴 내부를 구경하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짧은 언덕 지나 1119 미터 정상에 올라선다. '민둥산 억새축제' 기간임을 말해 주듯 정상석 앞에 수 십 명 산객들이 인증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억새 능선 사방으로 터진 조망은 막힘이 없고 장쾌하다. 함백산 꼭대기에 구름이 걸쳐진 모습과 하이원리조트 스키장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쌓인 산그리메가 참 보기 좋은 곳이다.
하늘도 우리의 정상 정복을 반기는지 숨었던 해가 구름 속을 나와 억새 능선을 밝게 비춰준다.
증산 읍내 방향으로 길게 뻗은 능선 전체가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등산로를 통해 억새를 보러 온 많은 산객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정상으로 향하는 억새 길 민둥산은 이름처럼 크게 내세울 것 없는 그저 민둥민둥한 산이었지만, 억새가 유명세를 타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제는 산에 불 지르지 않아도 먹고 살 만한 세상이 되었고, 민둥산을 찾는 산객들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민둥산 으악새도 가을바람에 리듬 맞추며 흥겹게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