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의 험란한 삶 7, 그리고 전후 공사기 1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7 (공사의 이야기만 끊임없이 진행되고, 6.25 전쟁의 끝 또는 휴전에 대한 언급 없이 공사 관련 이야기만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영암선은 전쟁 전(1949년) 착공되어 전후(1955년) 준공되고, 1956년 개통식이 열렸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참여한 정확한 공사 시기는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목을 위와 같이 달고 또 다른 장면으로 전환이 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대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일이 끝이나도 간주가 되지는 않는다. 풍편에 말을 들으니 삼양건설 사장이 그 공사에 수백만 원의 적자를 보고 피신하였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회사에서 인부들 노임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삼양건설회사를 찾아갔다. 회사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직원들까지 모두 피신을 하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 노무자들은 경북 영주에 있는 사장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의 집은 영주에서도 조금 큰 집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 집안에는 팔십이 넘어 보이는 두 노인네들만 살고 있을 뿐 아들 되는 사장 놈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사장 놈이 나타날 때까지 그 영주에서 우리 노무자들은 기다릴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 기다림이란 막연한 기다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달 석 달 노임을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진퇴양난의 격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작은 영주읍에 수백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자 영주에 모든 여인숙, 하숙집들은 어디 할 것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받을지 못 받을지도 모르는 노임만을 믿고 하숙집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나부터도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술이라도 잘 먹을 줄 안다면 그것으로라도 마음을 달랠 수가 있을 텐데, 나는 그것마저도 못하는 사람이다.


하루 이틀 열흘 보름을 지나고 나니 오장육부가 뒤흔들리며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비단 나뿐이랴. 게 중에는 처자들까지 와서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우리가 영주에 도착할 때에는 그 전표 한잔에 삼 할, 사 할씩 제공을 하고 전표를 팔 수가 있었는데, 보름이 지나고 나니 단 팔 할을 제한데도 그 전표를 살 사람이 없다. 완전히 석 달 동안 헛 노동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에 논 서마지기 까지도 날리고 만 것이다. 왜인지, 내가 하는 일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듯하다.


장사를 할 때는 돈을 못 벌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돈을 벌어 놓고도 그 돈을 찾지 못하게 되니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나는 박복한 인간이다. 글을 남들처럼 배우지 못하여 학식에 대해서는 절벽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나도 누구 못지않게 고루고루 능숙한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왜인가 열 백번 일을 할 때마다 다 실패로 끝이 난다. 팔자 소관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낙심이 되어 잠이 오질 않는다.


첫째 논 판 돈을 다 날려 보냈으니 처를 볼 면목이 없다. 차라리 기집질을 하고 노름이라도 했으면 잘못된 이유라도 남겠지만 이것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 돌아가서 사실을 고백하면 내 말을 누가 믿겠는가? 화투를 하다가 저 꼴이 되었겠지 하고 투방을 맞을 것이 뻔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로서는 실의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십일이 넘어가도 사장인 자의 소식은 아주 단절상태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주읍을 떠나려고 작성을 했다. 아무리 기다리고 있어 보았자 돈을 찾을 기미는 전연 없다.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다. 돈이 없더라도 그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분풀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더욱 억장 무너질 일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교량을 한 도급자 이씨를 찾아가서 나는 영주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했다면서 기왕에 떠날 바에는 전표를 사용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팔 할을 제하고 이 할만 돈을 받는데도 싫다고 하는 그 전표를 어디 가서 어떻게 사용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나는 이씨에게 그렇게 사용할 때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있지요, 있습니다. 내가 어제 하루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그런 곳을 알아봤지요. 우리 거기 가서 전표 있는 데로 톡톡 털어 다 씁시다." 하고 말했다.


기왕에 버리는 돈 그래서라도 쓸 수가 있다니까 조금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곳을 찾아갑시다. 어디인지 몰라도 잘 되었소."하고 나는 이씨를 바라다보며 가자고 재촉을 했다.


그러자 이씨는 우리 둘 만 가지 말고 손수익씨도 같이 갑시다. 그분은 우리 보다가 전표가 많으니 그렇게 한 번 해봅시다." 하였다.


하지만 손수익씨라는 분은 나이가 우리보다 많이 위이고 또한 그분의 별명이 꿀빙이라는 지독한 사람이니 우리와 같이 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손수익 영감님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이 씨는 손수익씨를 데리고 우리가 만나자고 하던 영주 삼일옥에 나타났다. 삼일옥이라고 하는 집은 그 당시 영주에서는 유일한 일류 술집이다. 다시 말하면 기생들이 많이 있는 그러한 요릿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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