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3
얼마동안 부산항 거리를 구경을 한 뒤 나는 성산댁을 찾아갔다. 전차들이 오가는 대로길을 따라 얼마간 걸었다. 인도가 너무 좁아 사람들끼리 부딪힐 정도이다. 얼마만큼 가다가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경묵이가 그려준 약도대로 걸어간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소개소가 하나 있다. 그래서 나는 소개소로 찾아가서 성산댁 집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십이 약간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아, 그 집. 그 집은 바로 저 집이야.” 하고 복덕방 주인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빨리 그 댁을 찾았다.
내가 찾아가자 성산어른은 반가이 나를 맞으면서 “아니 네가 어인일로 여기에 왔노?” 했다. 그런 뒤 그는 당신의 큰 댁 안부와 마을 전반에 걸쳐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아는 범위 내에서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런 다음 나는 내 소관을 말했다. 그것은 김수진의 주소를 말한 것이다. 그러자 성산 어른은 금방 수진씨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수진씨의 주소를 받아 들고 그 댁 가세를 휘돌아 보았다. 그 댁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의농을 대신하는 나무 궤짝 하나 하고 떨어진 요때기와 벽에 걸린 옷가지 두어 벌 그것뿐이다. 고향에서 듣기에는 부자로 잘 산다고 하였는데, 실지로 와서 보니 사실과는 아주 딴판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댁 가세를 보아서는 성산 어른이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한 모양이다.
고향을 떠날 때도 그분께서는 술잔에 가산을 탕진하고 떠난 분이다. 그러한 분이 지금도 그 버릇을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해서 나는 그 댁에서 하룻밤 머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댁을 떠났다.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날이 저물기 전에 수진씨의 집을 찾으려고 행동을 했다. 그런데, 성산댁과 수진씨가 살고 있는 집의 거리는 여간 멀지가 않다. 초량동이요 좌천동이다(Gemini 측정: 약 2.7km, 도보로 43분 거리). 그래서 나는 뛰다시피 걸음을 빨리했다.
내가 좌천동 마을에 이를 무렵에는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 좌천동 뒷산 그늘이 해안 깊숙이 밀려가고 있었다. 금방 날이 저물 것만 같았다. 좌천동에 이르러 수진씨의 집을 찾기 시작했다.
좌천동은 거의가 산 일번지로 되어있는 듯 집집마다 가서 물어보면 산 일번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집들이 산비탈에 붙어있다. 해서 나는 소개소를 찾아가서 수진씨의 주소를 내어 보였다. 소개소 사람들은 그 주소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그 주소를 가지고는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산비탈 전체가 산일번지기 때문에 몇 통 몇 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점심 굶고 저녁 굶고 두 끼를 굶은 데다가 갈 곳 없이 한동을 하게 되면 그 추운 겨울에 동사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을 하랴. 굶어서도 죽을 것이요, 추워서도 죽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가로등불이 하나 둘 기 켜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기진맥진하여 이제는 눈도 뜨기가 싫다. 더 돌아다녀보았자 수진씨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틀렸다.
산비탈 골목길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수십 수백 호 모두가 산 일번지로 되어있으니 그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다. 더군다나 어두운 밤이 되었으니 포기하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해서 나는 얼마간 앉아 있다가 거리로 내려갔다. 전차길이 있는 시가지에 내려서니 그 대로에는 아직도 낮과 똑같이 전차가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와글거린다. 그러나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낮과는 달리 한결 빠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겨가는 사람은 단 나 혼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골목길에 아무 데서나 막연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거리에 사람들이 있을 때까지는 나도 행인들의 행세를 하고 걸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배도 고프고 정신마저 혼미하여 발자국이 제자리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중병이라도 든 사람 모양 두 다리가 허둥허둥하다. 누구를 원망하랴. 내 눈을 내가 찔러 당하는 고생인데. 가족들 아무도 몰래 집을 떠나온 나 자신이 잘못인 것을.
와글 벅적거리는 인파들 틈에 끼어 약 한 시간쯤 걸어갔다. 어디서 스피카 소리가 왕왕거린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그곳은 내가 낮에 차에서 내린 초량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