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4
그 역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내게는 구면인지라 나도 몰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해서 나는 불문곡직하고 대합실을 찾아갔다. 물에 떠내려가던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에 의지하고픈 그러한 심정이라고나 할까.
대합실 안에는 막차를 탈 승객들이 하나 꽉 차있다. 그래서 그 안은 사람의 훈기로 그다지 춥지가 않다. 해서 나는 대합실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거기서 밤을 새워보겠다는 심정에서이다. 사람들이 떠난 뒤에라도 앞뒷문만 꼭꼭 닫으면 그다지 춥지는 않을 것만 같다. 조금 춥다 손치더라도 하룻밤을 넘길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배가 조금 고프다고는 하지만 거처할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얼마 후 막차가 본 역에서 들어왔다. 승객들은 개찰구로 다들 빠져나갔다. 대합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단 나 혼자뿐이다. 사람들이 다들 빠져나가고 나니 대합실 안은 별안간 썰렁해진다.
나는 텅 빈 넓은 대합실 안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사무실 쪽에 있는 창문이 열리더니만 푸른 복장을 한 역원 한 사람이 대합실로 들어온다. 나는 생각에 앞뒷문을 닫으려고 나오는 모양이지 하고 무심코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는 문 쪽으로 가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내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그가 그저 해보는 소리거니 생각하고 그날에 내가 겪은 일들을 일일이 다 말했다. 그러자 역원은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안 됐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람이 자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내일 당장 쫓겨납니다. 웬만하면 나도 조선 사람인데 왜 그럴라고요. 일본 놈들이란 인정사정도 없는 놈들이거든요. 그러니 내 사정을 보아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그 자가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수단인지는 몰라도 사실이 그자의 말과 같다면 내가 나가는 것이 도리인 듯 싶었다. 그래서 나는 두 말 하지 않고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해풍은 더욱더 차갑다. 이제는 자정이 가까워 오니까 그렇게도 왈그락 거리던 거리도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다. 간혹 서있는 가로등불만이 깜빡일 뿐 인가의 창불마저도 하나둘씩 꺼져간다. 이제는 아무 데도 가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역 담벼락에 얼마동안 기대어 앉아 있노라니 온몸이 저리고 시려온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곳에서 하룻밤을 넘길 것 같지가 않다.
밤은 아직도 자정이 못되었다. 그런데도 내 온몸의 뼈다귀는 뽀드득뽀드득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시리다가 못하여 아프다. 장정이라고 자부를 해오던 내 두 뺨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찬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나 자신을 증오라도 하듯이 손등으로 스쳐도 스쳐도 끝이 없다.
어리석은 인간, 못난 자식하고 자신을 증오해도 이제는 이미 때가 늦다. 얼마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노라니 양 오금이 달라붙는 듯 두 다리가 마비상태에 있다. 해서 나는 다시 일어났다. 저려오는 다리를 얼마간 주무르고 난 뒤 다시 걸었다. 그대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만 같다.
역전광장을 떠나 작은 사잇길로 들어섰다. 세상이 잠든 듯 깊은 밤이다. 간혹 뱃고동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곤 한다. 내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면 그쪽이 바로 바다 쪽이다.
나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서 그 좁은 길을 곧장 갔다. 그 골목은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골목이다. 그리고 길바닥마저도 고르지 못하고 엄펑덤펑하다. 어떤 때는 이마에 무엇이 부딪혀 눈에 불이 번쩍하기도 했다. 자정이 가까워 올수록 해풍은 더욱 차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온다. 으슥하게 생긴 곳이 있으면 잠시라도 앉아보고 싶었으나, 그러한 곳도 전연 없다. 으슥한 곳은커녕 얼마가지 않아 내 앞에는 운동장 같이 생긴 광장이 하나 나타났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그 광장은 운동장도 밭도 아니 그냥 노는 땅인 듯싶다. 그 앞에는 많은 배들이 선창에 매여 있고 그 뒤쪽에는 검은 나무까리가 쌓여 있었다.
탁 터진 벌판인지라 바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하다. 해서 나는 나무까리가 쌓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무까리니까 으슥한 곳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가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