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일탈 1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1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단 십리 밖을 모르던 나인지라 나는 거기만 가서도 촌닭이 시장에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하였다. 이때까지 외지에 사람들과는 단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그러한 촌뜨기다.


그래서 팔공산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역전광장에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무명베 바지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내 모습은 내가 보아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소메 속에 두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역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산골역인지라 봉림역사는 판자로 허술하게 꾸며져 있다. 그 모습이나 내 모습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후, 기차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그때서야 기차표를 팔기 시작한다. 나도 대합실로 들어가서 차표를 끊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같이 개찰구로 빠져나갔다. 홈 위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 오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들 한 가족인 모양이다. 잠시 후 기차가 들어왔다. 시꺼멓게 생긴 쇳덩어리가 소리를 빽빽 지를 때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 크나큰 기적소리는 멀리멀리 흩어져서 메아리로 변하곤 하였다.


나는 난생처음 기차를 구경한다. 그렇게 우렁차고 육중하게 생겼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가 쇠뭉치로 되어 있었다. 얼른 기차에 뛰어올라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 안에 들어서니 의자가 온통 텅텅 비어 있다. 철로가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중앙선 철로는 바로 그 해(1938년)에 개통되었다. 철로가 처음 생겨난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 보다가 승객이 적은 것은 우리 국민들이 가진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는 이삼십 리, 사오십리 걷는 것은 보통으로 여겨왔다. 기차가 있는데도 백리의 길도 걸어서 갔다. 부산 땅이 백리만 되었어도 나는 걸어서 갔을 것이다. 거기서 삼백리가 넘는 길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차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1938년 봉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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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기차는 봉림역을 떠났다. 텅 빈 넓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객실 안을 한 바퀴 휘돌아 보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의자에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 기차는 멀리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내려가는 장거리 열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들 졸고 있다. 그때 시절에 기차는 신의주에서 출발하면 스물네 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하게 된다. 시발점에서 승차한 손님들이야 그럴 수밖에는 없다.


기차는 금방 갑령굴을 지나 신령, 양정 들판 위로 달리고 있다. 그렇게 육중한 철마가 비호같이 달린다.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거기만 나가서도 화수동과는 딴판으로 들판 위에 보리싹 씨가 제법 좋다. 갑령재만 넘었어도 기온차이가 그렇게 크다.


달리는 차창 밖에는 전주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뒷걸음을 치고 있다. 들판도 빙빙 도는 듯싶었다. 참으로 빠르다. 어느새 신령역에 도착했다. 그곳만 갔어도 많은 인가들을 볼 수가 있다. 얼른 보기에는 천여 호가 되는 듯싶다. 도회지도 아닌 농촌 마을이 어쩌면 그렇게도 클까. 맨 초가집들이다.


기차는 신령을 떠나 영천 주남들판 위로 달려간다. 남으로 나갈수록 들판들은 더욱더 광활하다. 주남들판은 눈이 모자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좌측 언덕 위에는 수천의 적고 큰 집들이 집단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본 놈들이 심어놓은 사과밭이 이색적이었다.


아화, 건천을 지나 내가 탄 기차는 벌써 경주 부근에 이르렀다. 작은 터널 하나를 지나고 나니 남북으로 길게 뻗어진 황남천이 보인다. 그리고 그 좌측에는 무열왕릉이 자리하여 있고 우측 건너편에는 신라 오능의 우거진 숲들이 보였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능 같기도 하고 작은 산 같기도 한 그 뫼가 무엇인지 전연 알 수가 없다. 그것도 한 두 봉우리가 아니고 여러 개로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드문드문 있다. 어쩌다가 그 매봉에는 소나무 또는 잡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곳도 있었다. 들 복판에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무슨 사연이 잇는 듯싶다.


그래서 나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그것이 무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노인장은 나를 돌아다보며 “젊은이는 경주에 처음이로구먼, 저것이 봉황대일세. 아마 신라 어느 왕릉일 걸세. 저 큰 봉우리를 사람의 힘으로 모아진 것이라고 하니 장관이지.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쌓을 때처럼 백성들을 반쯤 죽였을 거야. 그때는 요즘 세상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리라 생각이 되니 하는 말이지.” 하였다.


노인장의 말슴이 끝나기도 전에 기차는 벌써 경주역에 이르렀다. 신라 고도라서 그런지 경주역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 모색이 쌀과 같이 생겨있다. 그리고, 경주 시가지도 거의가 평지요 한옥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거리다.


[1930년대 경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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