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7
그러나 아직은 열 두시가 안 된 모양이다. 정오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연병장 안으로 들어갔다. 훈련소 마당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와글 벅적하다. 덕실은 내 왼 손을 꼭 거머쥐고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해서는 안돼.” 하고 버드나무 그늘 밑으로 끌었다. 나는 이덕실을 따라 버드나무 밑으로 갔다.
오월의 태양은 연병장 마당을 덥히는 듯하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 앉아 우글거리는 군중들을 바라다보았다.
거기에 모인 훈련생들은 다들 우리와 같은 촌뜨기이다. 전부가 바지저고리를 입은 텁수룩한 농촌 출신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우리처럼 강제적으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연병장 연단 후편에는 높은 장대를 세우고 일장기를 달아 바람에 펄럭인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의 태극기를 조선으로 보곤 하였다. 큰 방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태극기였다. 그 태극기는 천장에 달리 할아버님의 갓집 밑에 박혀 있으니 말이다.
태극기 없는 연병장 누구를 위해 훈련을 한다 말인가. 불을 뿜는 오월의 태양인데도 훈련생들의 가슴마다에는 찬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정말 서글픈 일이다. 나라도 태극기도 사람마저도 일제의 발꿈치에 짓밟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하는 말이다.
일장기를 바라다보며 증오하고 있을 즈음 어디서엔가 호각소리가 갑작스레 들려온다. 그 호각소리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본 소리이다. 일본놈들이 사람을 집합시킬 때는 언제나 그 호각을 분다. 사람을 움직일 때면 틀림없이 그 소리로 이용한다. 너무나 많이 들어온 소리인지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유무식간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훈련생들은 그 호각소리를 즉각 알아듣고 연병장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사열 횡대로 줄을 지어 섰다. 거기에 모인 훈련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훈련을 받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금방 척척이다.
일본놈 하나가 연단 위에 올라선다. 처음 보는 자이다. 키는 작아도 나이는 제법 많아 보였다. 그자는 연단 위에 올라서기가 바쁘게 연설을 한다. 그자들의 연설은 들으나 마나 뻔하다. 먼저 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어 “덴노헤이까”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일본놈들은 중일전쟁을 가리켜 지나사변이라고 일컬었고 세계 제2차 대전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저들이 옳고 저들이 우월하고 남의 나라가 옳은 것은 전혀 없다. 그날에도 일본놈의 연설 내용은 중일전쟁도 중국이 먼저 침범한 것으로 되어 있고 대동아 전쟁도 미국이 먼저 침범하여 방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연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일본놈들은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그것도 한두 번이라면 또 모른다. 같은 말을 백 번 천 번 되풀이하는 통에 나중에는 시작만 하여도 짜증이 난다.
그 당시 일본놈들은 내선일체라고 떠벌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나라 백성들을 개 취급을 하였다. 우리 훈련생들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내심으로는 야 이 더러운 놈들아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예가 된 우리로서는 치만 떨릴 뿐 어쩌랴. 일본놈들은 번갈아가면서 연설을 한다. 연설이 시작된 지가 무려 세 시간이나 되었는데도 연설은 계속되었다. 나는 발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뒷전에 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정오 때 시작한 연설은 석양 나절에 가서야 끝이 났다. 훈련생들은 다들 하나같이 눈이 쑥쑥 들어갔다. 연설이 끝이 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뿔뿔이 헤어졌다. 대개가 다 음식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게 중 몇몇 사람들은 그냥 연병장 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는 배가 고파도 돈이 없기 때문에 그러고 있다. 나 역시도 그날따라 맨주먹이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같이 연병장 안에 있었다.
나는 덩치가 남달리 조금 큰 편이다. 그리고 식성도 보통 사람들의 두 배였다. 하다가 보니 한 끼를 굶는다 해도 배가 고프다가 못하여 아프다.
얼마 후 덕실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미스하라, 니 와 여긴노? 밥묵엇나?” 하고 내게 묻는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는 그였다. 그러한 자가 저 배를 채운 뒤에 와서야 그런 말을 한다. 제 것 가지고 저 마음대로 하는 것을 무어라 말할 필요는 없다. 하나 나는 왜인가 그가 미웠다. 내가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얻어먹고 싶어서도 아니다. 진실한 친구라면은 행동부터 앞서야 도리가 된다는 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