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에서 징용으로 5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5


밤은 자정이 훨씬 넘은 듯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나 혼자서 이때까지 지껄이고 나니 이제는 배마저 고프다. 그래서 나는 "자, 우리 한 대씩 피우고 나서 하자꾸나" 하였다. 그러자 경달과 진묵은 계속하라고 독촉이다.


담배를 한 대 말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야경을 바라다보았다. 어디에선가 소쩍새가 울고 있다. 길게 한 모금 쭉 빨아 후우 하고 밖으로 내어 뿜은 담배 연기는 허공으로 올라가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 담배 맛은 천하일미이다. 애연가가 아니고서는 그 진미를 모를 것이다. 울적한 심정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그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맛 어떠한 보석금화를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 맛이다.


담배를 피우면서 흐르는 달빛과 들판을 바라다보았다. 교교히 흐르는 열 나흘 밝은 달빛은 대낯을 방불케 하고 황금물결로 이루어진 가을 벼 잎사귀에는 저녁 이슬이 구슬로 변하여 반짝인다.


마지막 구경을 하는 우리의 농장, 그 농장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을 할 때 나의 암담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다. 고독의 한숨만이 쏟아져 나올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착잡한 심정을 알 리가 없다. 갑산댁 태방우가 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도 처지가 나와 같이 감히 이러쿵저러쿵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창공을 바라다보며 애끓는 두견의 구슬픈 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야, 빨리 담배 피우고 시작하자꾸나." 경달은 바쁘다는 듯이 독촉을 한다. 내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가 내게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달이고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밤은 자정을 훨씬 지난 듯하였다. 잠을 자기는 다 틀렸다. 동료들도 아예 이야기로 밤을 넘길 작정인 듯싶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만두고 자러 가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는 양창곡이가 대원수가 되어 백전백승으로 북쪽 오랑캐를 무찌르고 있는 대목까지 이르렀다. 거기서부터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얘기는 더욱 복잡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대목도 있고 약간 음란한 편에 속하는 대목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러한 대목에 이르게 될 때에는 경달과 진묵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하다가 보니 때로는 좌중이 떠들썩하게 웃음바다로 변할 때도 있고, 때로는 젊은 혈기방강을 그대로 내포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쥘 때도 있었다.


이야기에 따라 더러는 착잡한 심정을 내포하듯 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동료들은 그 무엇보다도 기대를 하는 것은 양창곡과 홍난이가 언제 어느 때에 가서 만나냐 하는 그 대목을 바라는 눈치였다. 거기까지 가자면 아직은 많은 줄거리가 남아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는 옥루몽 사권 중 아직 첫 권 끝대목에 이른 것이다. 책의 량을 말하자면 삼국지보다 조금 많은 듯하다. 그러니만큼 양창곡과 홍난이가 만나는 그 대목은 아직은 많이 멀었다. 날이 밝아 오는 바로 직전에 나는 하던 얘기를 뚝 끊고 또 한 대의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 물었다.


"에이 그놈의 담배 때문에..." 경달은 내가 담배를 피울 적마다 투덜거렸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 동쪽 하늘이 밝아 온다. 그리고 저편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인적에 놀란 개소리가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날은 음력 팔월대보름 날이다. 될 수 있으면 일찍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동료들은 내 얘기에만 정신을 다 쏟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연 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가자꾸나 하였다. 그러나 경달은 "연년이 지내는 제사 한 해쯤 안 지낸다고 할아버지가 무어라 할라구. 괜찮아. 할아버님의 책임은 내가 다 질 터이니까..." 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배를 껴안고 웃었다. 아주 훤히 밝아 온다. 이제는 누구도 더 앉아 놀자고 하는 사람이 없다. 차례를 지내려면 지금 곧장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루 밤을 농막에서 새우고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날이 보름날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조바심을 내어 들어가지를 않았을 것이다.


우리 네 사람은 물을 건너는 것처럼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붙이고 이슬이 자욱한 논둑길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슬 밭 구덩이 속을 가면서도 경달은 "에이 그놈의 홍난이가 양창곡을 만나는 것을 보아야 좋았을 걸..." 하였다. 우리는 이슬밭 속에서 또 한바탕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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