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고향의 추억 4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4


멍에에 홀친 소모가지가 끊어질 듯하게 짤록한가 하면 소목구멍에서는 흐르릉 흐르릉 대톱질하는 소리가 난다. 그 잘난 논을 갈았다고 내 두 팔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다. 해서 나는 논바닥에 소를 세워두고 뚝방으로 나갔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넓은 방천뚝 위에 올라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희멀건 하늘에는 잔잔한 실구름이 깔려 있고 옥녀봉 산중턱에는 한 마리의 까막 독수리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시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소가소 암석 틈에는 눈 녹아 흐르는 산골 물소리가 쉴 사이 없이 청아하게 들려온다.


바로 그때였다. 큰 뚝 저편에서 큰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할아버님의 기침소리다. 나는 겁이 벌컥 났다. 남달리 급한 성질을 가지신 우리 할아버님이신데, 내가 갈아놓은 논바닥을 한 번 가서 보게 되면 당장에 벼락이 내려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것도 일이라고 했나" 하는 소리가 금방 들려오는 듯했다.


방천뚝을 넘어선 우리 할아버님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논바닥을 한 바퀴 휘돌아본다. 그런 뒤 할아버님은 내가 앉아있는 대부뚝으로 올라오셨다. 나는 일어나서 추운데 나오셨느냐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할아버님은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띠시면서 “예야 금년같이 가문 해에는 논을 가는 데 있어 욕심을 내어서는 안 돼. 일을 적게 하더라도 반자락 논을 갈아야만 하는기라” 하셨다. 그리고 “자주자주 쉬어서 하려무나” 하는 말씀도 곁들였다.


너무나도 예외이다. 불벼락이 내려질 줄만 알았던 할아버님이 찌푸린 기색 하나 없이 그렇게 온화한 말씀을 할 줄이야. 할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 일지라도 내가 갈아놓은 논바닥을 보고 꾸지람을 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님은 이 날따라 단 한 마디의 꾸지람도 없었다. 도리어 자주자주 쉬어가면서 하라는 위로의 말씀까지 하시지 않았는가? 할아버님의 온화함 말씀에 나로서는 한없이 기뻤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뒤 할아버님은 강변으로 나가셨다. 오늘도 미비한 방천뚝에 손질을 할 모양이시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소목에 멍에를 걸고 논을 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할아버님이 시키시는 그대로 처음부터 반자락 논을 갈았다. 그렇게 하고 보니 한결 수월하다. 힘이 덜 들 뿐만 아니라 양어리도 전연 생기지를 않았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리만큼 자신감이 생긴다. 힘만 있으면 되겠지 했던 나의 오판, 일이나 글이나 역시 배우지를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가 있었다. 욕심을 내지 않고 반자락 논을 갈게 되니, 나뿐만이 아니라 소 역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추근추근 당겨갔다. 꼬리를 흔들어 등에 붙은 파리까지 쫒곤 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일이 이렇게 잘 풀리게 되니 어깨가 으쓱한 듯 재미가 붙는다. 일이란 글과는 달라서 하면 한 것만큼 당자에 그 자리가 뚜렷하여 힘이 든 것만큼 보람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날따라 할아버님이 나왔으니까 그렇지 할아버지가 나오시 지를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 등골에 땀이 날 정도이다.


이리하여 나는 그해의 춘경을 내손으로 다 하였다. 가족들도 다들 기뻐하는 눈치였다. 할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을 내가 대신하게 되니 누구보다가 기뻐하는 사람은 우리 어머님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성장하여 시부의 일을 대신한 이가 한편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 보다가도 어머님이 기뻐하는 참 뜻은 효성에서 우러나오는 도리일 것이다.


우리 어머님은 효부였다. 남편인 나의 아버님을 생이별하고 젊은 산 생애를 시부모 공양에 다 바쳤으니까. 그래서 동리 사람들은 어머님을 가리켜 효부라고 하였다. 불학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어머님의 극진한 효성만은 나 역시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효부 겸 열녀였다.


십수 년 동안을 독수공방을 하면서도 남편의 소기만을 기다린 우리 어머님, 언제나 묵덕초군처럼 손발이 거칠었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 어머님이었다. 내가 마음을 잡아 일을 시작한 연유도 어머님의 효성에 감탄하여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전혀 거짓말은 아니다. 눈이 있어 어머님의 일거일동을 보았고 귀가 있어 남의 말을 듣고 보니 내 비록 무지렁이나 그를 모를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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