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에서 온 상사와 지구의 나

타 죽지 않고 나만의 궤도를 지키는 '행성적' 거리두기

by 비타민W

회사의 문을 열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만 가지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비슷한 지역,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만 만나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버지뻘 상사부터 제주도에서 온 동료까지, 저마다의 중력과 궤도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인다.


오랫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굳어진 사람들을 내 기준에 맞게 튜닝할 수는 없다. 결국 가장 현명한 길은 그저 '다름'을 인정하고 내 궤도를 사수하는 것이다.


소란스러운 노란색과 차분한 남색

동료 A는 나와 정반대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필터 없이 곧장 뱉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모임 주최에는 늘 앞장섰고,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워낙 커서 어디서든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강렬한 사회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녀를 두고 누군가는 "나댄다" 혹은 "시끄럽다"며 수군거렸다. 정반대의 성향인 내가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녀를 '나와는 톤이 다른 사람'으로 분류했을 뿐이다.


사실 내가 타인에게 관대한 이유는 인품이 태평양 같아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조차 내게는 '극심한 에너지 낭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에너지를 아껴 쓰고 싶은 지독하게 정적인 사람일 뿐이다. 미워할 힘조차 아껴서 나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가성비 인간관계였다.


물론 그녀와 식사를 하고 나면 여름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온몸의 수분과 기운이 바짝 말라버린 기분이었다. 방방 뜨는 억양과 넘치는 기운에 내 에너지를 모두 '흡수'당한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이 온통 나 같은 'I(내향인)'들로만 가득했다면 얼마나 단조로웠을까 싶다.


봄날의 진달래도 하얀 꽃이 곁에 있어야 분홍빛이 더 탐스럽고, 초록 잎이 있어야 개나리의 노란색도 몽글몽글 돋보이는 법이니까. 그녀의 소란스러운 노란색 덕분에 나의 고요한 남색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믿기로 했다.


금성의 상사, 지구의 나

상사 B는 일터의 전사였다. 그녀가 이끄는 조직은 지옥 같은 업무 강도로 악명 높았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성과를 냈다. 나는 그녀의 열정과 리더십을 존경했지만, "마른걸레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방식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금성'이었다. 반면에 나는 '지구' 같은 사람이었다. 금성은 태양과 가까워 뜨겁고 대기 압력이 엄청나다. 그녀는 그 뜨거운 열기와 높은 압력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유난히 밝게 빛나는 존재였지만, 평화로운 지구인인 내가 그녀의 생태계로 깊숙이 들어갔다간 타 죽거나 압사당할 게 뻔했다.


서로의 중력을 존중한다는 것

나는 그녀를 비난하는 대신, 우리가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내게 "저분과 가까워지는 게 승진으로 가는 고속도로인데,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없냐"며 답답해했다. 야망도 꿈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걱정 섞인 참견들에 나는 넌지시 대답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 나면 더 크게 다치는 법이잖아요. 조금 빨리 가려다 영영 빨리 갈 것 같아서요.”


하지만 누군가 그녀와 같은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 그 뜨거운 중력 안으로 기꺼이 뛰어들 때, 내게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화려한 성공보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소박한 평화가 더 중요했다. 굳이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나를 채찍질하거나, 그 곁을 맴돌며 아부의 기름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거리 두기가 아니라, 나라는 행성의 대기가 파괴되지 않게 지키는 '최선의 생존'이었다. 무리하게 다가가 타버리는 대신, 내가 가장 나답게 빛날 수 있는 궤도에서 그녀의 열정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우주적 생존 전략이었다.


거리 두기는 차가운 단어가 아니다.

누군가는 수성처럼 뜨겁게 달궈지며 살고, 누군가는 명왕성처럼 차갑고 고요하게 산다. 각자의 적정 온도와 환경이 다르니 억지로 섞이려 애쓸 필요는 없다. '거리두기'는 차가운 단어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따뜻한 보호막이다. 서로의 중력을 존중하며 각자의 궤도를 지키는 것. 너무 가까워져 타버리지도, 너무 멀어져 길을 잃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회사라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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