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나 직함이 아닌, 품격에 대하여
20대의 나는 상사란 그냥 참고 견디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오래 버텼지만, 진심으로 따르고 싶은 상사는 없었다. 진짜 어른을 만나기 전까지는.
외국계 회사, 국내 제조사, IT 기업까지 두루 거친 '회사 컬렉터'로서 나는 월급쟁이 대표부터 그룹 2세대 경영인, 젊은 창업자까지 수많은 리더를 만났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드는 엄격한 곳부터, 반바지에 모자를 쓰고 일하는 자유로운 곳까지. 그 다양한 풍경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소중한 진실을 배웠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닮고 싶은 '진짜 어른'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능력자의 차가운 눈빛과 뜨거운 열정
내 상사였던 A 씨는 40대에 IT 기업 계열사의 대표가 된 인물이다. 젊은 임원으로서 좋은 평판을 갖고 있었기에 처음엔 단순히 호감과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나의 상사가 되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서움’이었다.
그는 상냥하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중했고, 때로는 농담과 위트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할 때는 눈빛이 차가웠고 어떤 것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으며, 모든 것을 기억했다. 말 그대로 ‘능력자’였다.
업무 보고를 드릴 때 그의 눈은 반짝였고, 그는 왜곡이나 편향 없이 내용을 받아들였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두려웠다.
무능한 리더가 나를 욕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 그가 내 실력에 실망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그의 에너지와 열정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우상처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더 잘하고 싶었고,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는 1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임원급 인사였지만, 직급이 낮은 직원이 퇴사 의사를 밝히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 직접 대화를 나눴다. 퇴사 사유를 듣고, 회사에 실망한 부분을 확인하며, 가능하다면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실제로 그의 배려 덕분에 회사에 남아 성장한 직원들도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인적 자원 관리와 일반 업무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교과서적인 답을 했다. 매일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하고 자기 계발에 힘쓴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저 그렇구나 했지만 연차가 쌓여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의 '교과서적인 성실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사람을 사로잡는 힘 '경청'
A가 열정과 실력으로 사람을 움직였다면, B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B 씨는 미국에서 스타트업 기업을 매각하고 한국 유명 IT 기업의 대표를 역임한 인물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한 아우라와 '어른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달라진 동료들의 모습에서 그 품격의 실체를 보았다.
B 씨는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원의 결정을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 작은 차이가 기적을 만들었다. 동료들은 기계적으로 일하기보다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기 시작했다. 업무와 성과에 대한 열정이 눈에 띄게 늘었고, 무엇보다 사무실에 웃음이 많아졌다. 사원부터 부장까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B님을 위해 꼭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B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맹장(猛將)보다는 지장(智將),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라고 했다. 나는 진정한 덕장을 만난 것 같았다. 그는 단순히 인자한 리더가 아니었다. 성공한 기업가가 일개 직원의 이야기에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줄 때, 직원들은 하나같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그가 기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힘은 결국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이끌어내는 강한 진심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꿈꾸는 어른의 모습
내가 만난 두 리더는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우리가 마음껏 뿌리내리고 잎을 틔울 수 있도록 단단하고 비옥한 땅이 되어주었다. 그 믿음직한 바탕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자라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결국 '어른'의 품격은 나이나 직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세월에 떠밀려 몸집만 커진 채 주변을 척박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지만, 누군가는 깊어지는 세월만큼 타인을 품어 안는 넓은 대지가 된다.
타인의 잠재력을 믿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게 만드는 힘.
그 고요하고도 단단한 진심이야말로 우리가 닮고 싶어 했던 진짜 어른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