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기
글 발행 2시간 반을 남겨두고 써두었던 글을 엎습니다. 제시간에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뒤적이다가 보관 처리해두었던 게시물들을 발견했습니다. 2021년에 쓴 글이 많습니다. 3년 가까이 지난 글들인데, 다시 보다 보니 그때 참 애 많이 썼구나 싶습니다. 룸메이트가 자퇴하면서 혼자 방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보관해둔 글을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자습 다녀와서, 혹은 아침에 일어나서 공부가 하기 싫을 때 저는 글을 썼습니다. 절망감이나 답답함에 눈물이 날 때도 글을 썼습니다. 오늘은 3년 전 그 기록들을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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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고 재학생이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앞으로의 진로를 한정짓는다고 생각했어.
당연히 사회, 정치, 외교 내지는 외국어 정도의 계열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경제경영은 나랑 안 맞으니까 아예 이과 계열은 더더욱 그렇고.
거기다 인문계는 아무래도 취업이 힘들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니까 (물론 나는 인문학을 무시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강경 문과이지만) 안정성을 생각했을 때 교사 쪽으로 나가야 하는 건지도 고민했었어. 제대로 된 공부, 깊은 공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나는 뒷걸음질부터 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 꿈은 항상 좀 애매모호 했어. 대답을 잘 못하겠더라고. 사회 분야 쪽에도 물론 관심이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근데 오늘 시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나를 보면서 아빠가 해준 말이 너무 기억에 남았어.
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거야. 아빠도 가슴이 뛰는 공부를 하기로 선택한 거라고, 남들이 '그거 뭐하러 공부하냐 돈도 안 되는 거'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라고 하라고 네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물론 몇 년 공부하다가 현실과 약간의 타협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걸 공부하고 배우고 하면서 대학 생활을, 20대를 그렇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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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2
이 글을 보고 나니 생각이 납니다. 처음으로 사회과학 대학이 아닌 인문과학 쪽으로 방향을 고려하기 시작했던 날이었습니다.
사실 2학년 때는 정말로 선생님이 되는 것도 고민했습니다. 집안에 교사나 교수 출신이 많기도 했고, 어쨌든 진로 적성 검사를 하면 추천해주는 직업군으로 교사가 많이 등장하고는 했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때 좋은 선생님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물론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 덕분에 후에 고3 생활을 잘 버텨낼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제가 만약 교사가 된다면 이런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처음 생각하게끔 해주셨던 분은 부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젊은 선생님, 우리 학교에 처음 부임했던 선생님, 그렇지만 학생들을 사랑하는 게 정말 많이 느껴졌던 분이셨죠. 유독 2학년 때 반이 부담임 선생님과도 각별했습니다. 수능을 보고 졸업을 하던 때까지도요.
아무튼, 선생님은 여전히 좋았지만 이날 이후로 저는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기보다는 일단 스스로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즐길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시인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지간히 즐거웠나 봐요. 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길일 수 있겠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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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는 펑펑 울었다. 시험지를 다시 보니까 마음 한구석이 너무 답답해져와서 우니까 엄마아빠한테도 더 미안해졌다.
지난 날들, 행복했던 시간들에 대해 후회 안 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선행도 더 빨리 시작했어야 했나 싶고, 플래너를 뒤적여 보면 난 절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는 건가 싶고, 그냥 그게 너무 바보같고. 그래서 평범한 조언도 대화도 가시처럼 느껴져서 속상하고 힘들고 외로웠다.
부모님이 앞에 있는데도 나는 그 순간 몸이 하늘에 붕 뜬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고 고립되는 것 같았다.
모의고사에서, 그것도 수학 시험에서 반 1등 한 번 했다고 자만했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아니고, 오히려 불안해서 더 열심히 했다. 내신은 그만큼 안 나올 것을 알았으니까. 이 이상으로 어떻게 해야 해.
어쩌면 나는 멍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씩은, 정말이지 이렇게 눌러오는 순간순간의 모든 것들에 짓눌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다는 거고.
그냥, 다시 쳇바퀴처럼 인생이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나를 다독여주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2021.10.17.
그냥 잘 안 풀리는 날이었다.
언어와 매체 서술형 채점 결과도 꽤나 처참했고, 아무리 내가 문학을 사랑하고 문법을 흥미로워한다고 해도 점수는 그 애정과 흥미에 비례하지 않았고, 이 사회는 애정과 흥미도보다는 점수에 의해 서열화 되어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도록 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사실 힘이 없었던 것 같다.
조금은 슬펐고, 또 지쳤고 피곤했다.
아마 오늘 체육 시간도 보통의 경우에는 그냥 좀 속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냥 잘 안 되는 날인가 보다, 하면서. 조금은 팀원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근데 그게 안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지지 않는 날이었다. 서브가 안 먹히면 안 먹힐수록 속상했고, 내 안에서 너는 운동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면 잘하는 게 뭐냐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찔러왔다. 그리고 그런 내가 팀에 조금의 도움도 안 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스포츠를 하다 보면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긍정적인 말로 팀을 다독이는 한 편, 누군가는 적당히 받아치고 넘기면 될 말을 꼬투리잡고 남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절대 누가 날 비난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오늘의 내가 힘들었을 뿐이고 그래서 눈물이 났고 그것마저도 너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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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습실에 가니까 익명의 쪽지와 마이쮸가 놓여 있었다. 예상치 못해서 그런가, 고마웠고 기분이 좋았다. 말 몇 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산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확실히 아닌가 보다 싶었다.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잘 견뎌가고, 잘 사랑하며 지내는 축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고마웠다.
짐작이 가는 친구는 있는데,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더 고마울 것 같다.
주변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좋은 사람들이 더욱 많아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잘 것 같다.
마지막은 책에서 본 구절.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적어본다.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中-
2021.10.20.
학교에서 융합 인문학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나태주 시인을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싸인을 하나하나 열심히 해주시겠다며 학생들에게 제공되었던 시집을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하셨고, 강의하는 내내 앉지도 않고 일어서서 진행하셨던 분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카페를 커피숍이나 카페라고 부르지 않고 찻집으로 말씀하시는 것까지도 좋았다고, 제가 어느 가을날 써두었던 글에 그렇게 나와 있네요. 팬이기는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셨던 말씀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셨던 이야기였습니다. 능동성을 가지라고. 선한 영향력을 논하던 시인의 모습이 다정하고도 빛나서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좋은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당장의 하루하루를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닭장 같은 자습실에 매일 틀어박혀서 저녁 시간에는 자습을 하는 것이 의무였던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는지도 모릅니다. 독서실 책상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그 자습실에서 코 박고 공부를 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며 경탄하는 법은 종종 잊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적과 등수가 시야를 가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게 합니다. 자칫하면 내 이름은 사라지고 반에서 몇 등이, 혹은 학년 전체에서 몇 등급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내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처럼요:
(...)
성적이 꼬이니까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감이 떨어지니까 인간관계도 힘들어지고
힘드니까 집중을 잘 못할 때도 있었어서
한 마디로 정말 엉망이었어. 중간고사 성적표 받은 날 이후로부터.
근데 나만은 나를 미워하면 안 됐고
나만은 내 편이어야 했고
내가 내 편이 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줄 때 감사할 줄 알아야 했고
그냥 그래야 했던 거야.
나를 아껴주는 게 모든 것의 출발점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게 잘 안 됐어.
모순이었던 것 같아, 내 마음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사랑하고 누굴 아끼겠다는 거였는지.
(...)
2021.11.08.
세계사 시험을 위해 암기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도 링컨 대통령과 헌법 수정 조항 제13조를 가지고 심화 발표를 준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영화도 알게 되었고, 역사는 곧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흐름이니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이 저로서는 즐겁지 않을 수 없었죠. 생명과학 시간에 교과서에서 보았던 뇌와 기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원래 좋아했던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내용을 접목시켜 준비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출석 번호 순으로 발표하다가 점심시간 종이 치기 전에 랩하듯이 발표를 해야 했지만 싫지 않았죠. 영어 독해 수업에서 배웠던 디스토피아 소설을 가지고 능력주의와 획일적 평등주의에 관해 진행했던 자기주도 탐구 내용을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개의 발표를 진행해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냥 군소리 없이 열심히 했습니다. 세특을 위한다는 것은 사실 표면적인 이유였죠. 세특을 신경쓴다는 것은 곧 대학을 더 잘 가고자 노력하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저는 그냥 세특 항목에 선생님들이 나를 어떻게 보셨는지 상세하게 적어주시는 게 좋았거든요. 저에 대한 평가가 숫자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서술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험 성적은 그저 그렇다고 해도 발표는 즐겁게, 들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전달력을 높여서 준비해가는 행위가 저에는 대학을 위한 평가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고, 다르게 보면 숨을 쉬기 위한 하나의 생존법이었습니다.
잘하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공부법이 있었지만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실력을 의심하게 될 때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선생님 앞에서는 괜히 혼자서 숨죽일 때도 있었죠. 성적이 좋은 친구들 앞에서는 기가 죽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내가 잘하는 게 있는데, 그걸 내세우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스운 듯하게 느껴졌달까요. 이런 건 고등학교에 와서야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눈치를 보는 것. 왜 그렇게까지 움츠러들었는지, 만약 그때의 저에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어깨 피고 당당해지라고 해주고 싶어요.
고3으로 올라가기 전, 저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담당하셨던 정치와 법 시간에 유일하게 대면으로 심화 발표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스웨덴 총리의 선출 과정과 관련된 이슈를 보고 수업 시간에 배웠던 의원 내각제의 개념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었는지를 놓고 발표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공부할 때만큼은 철저하신 담임 선생님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발표에 허점이 있다면 난 학생이니까 결국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냈었죠. 발표가 끝난 뒤, 직접 말로 칭찬해주시는 일은 드물었던 선생님이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하시는 호평 중의 호평 앞에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칭찬 하나가 저에게 방향키가 되어주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공부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시험 성적이 높지 않을지언정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을 발판 삼아 수험 생활을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많이 방황하던 저를 살렸던 많은 순간 가운데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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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인생에 대한 고민은 대학 가서 하라고들 하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 타입이라 그건 안 될 것 같다.
기계처럼 공부하라고들 하는데, 그냥 인간이길 포기하고 해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 아는데, 그래서 내가 떠안고 있는 이 모든 고민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는 거 아는데
나는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라서 동의는 못할 것 같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게 오답이라면 실망이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 공부하는 게 틀렸다고 해도 나는 내 답을 고칠 생각이 없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내 목표도 좀 찾고,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2.01.14.
그래서 저에게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기계적으로 공부하라는 말에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끝끝내 그랬습니다. 이 악물고 기계가 되었다면 대학 간판이 사회에서 규정하는 단계에 따라 한 두 계단 정도 더 올라갈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저라는 사람의 특성상 스스로를 잃어버렸을 테고, 그렇게 입시가 끝난 뒤 과연 멀쩡한 모습으로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제가 배웠던 진정한 공부의 방식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좋아했던 공부가 주입식이 아니라서 기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공부는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박혀버리고 말아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자유롭기 위함이라는 이야기가 어느 여름날에는 불현듯 이해가 되고 말아서, 저는 자유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비록 수험생활을 마칠 즈음에는 기대했던 성과를 당장에 얻지 못했을지라도, 그 가르침은 제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였고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솔직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가 부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불평하며 그저 멱살잡혀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살아내고 또 때로는 물 흐르듯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배우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남들과 비교할 때 '한두 계단'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만을 바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배움으로 내가 살아가는 오늘이 조금 더 윤택해지기를, 그렇게 삶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자신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적표에 나타나는 지표가 한 사람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살면서도 마음으로 이 명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더 풀어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아픈 시간을 견뎌내느라 고생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이 인사가 여러분과 저 모두에게 가서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마음을 담아,
2024.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