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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린 Sep 28. 2024

숫자 너머의 명랑한 마음을 위하여 (1)

동글동글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수험생의 이야기


피하고 싶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달리 피할 방법이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고3을 앞둔 겨울 방학이 되자 저는 크게 세 가지의 목표를 잡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 논술을 노릴 것. 2. 학교 공부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 3. 수능 공부가 아무리 재미없어도 논술 최저를 생각하면서 버틸 것.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논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방학 동안 들으려고 했던 논술 방과후가 폐강되면서 선생님은 저에게 몇 개 학교 기출을 풀어서 보내 보라고 해주셨고, 저에게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열심히 준비해 논술로 원서 넣고 싶은 학교는 다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응원에 힘입어 저는 방학 때부터 혼자 논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능 공부보다는 논술 공부가 훨씬 재밌었고, 그래서 수능 공부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때마다 논술을 생각하면서 버티고는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누가 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3학년이 되어 첫 등교를 했던 날, 저는 개학식을 하면서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을 듣고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수학.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제일 자신 없는 과목이 수학이었거든요.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수학 선생님 반은 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도덕 선생님도 한문 선생님도 만나봤지만 수학이라니! 괜히 긴장되었던 거 있죠. 거기다 담임 선생님은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측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고3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또 있었으니, 바로 코로나였습니다. 그해 3월에는 코로나가 크게 유행해서,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잘 버텼던 저희 가족도 덮쳤습니다. 부모님이 차례로 걸리시면서 저도 검사를 받으러 다니고, 음성 판정을 받고 기숙사에 있을 때도 계속 자가진단을 하면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한 번은 등교하기 전에 키트에 희미하게 두 줄이 떠서 집으로 갔다가 다시 검사해 보니 위양성이었던 적도 있었죠. 코로나가 퍼지는 걸 염려한 사감 선생님의 다소 당황스러운 단어 선택으로 상처받아 울기도 하고, 룸메이트에게도 괜히 눈치 보이고 미안하고. 혼란 가득하던 3월이었습니다.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코로나를 기적적으로 피해 갔지만, 주변 친구들은 당시에 많이 걸렸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팠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잘 이겨내고 공부할 수 있었는지, 코로나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당시 고3이었던 모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코로나는 코로나고, 수험생은 수험생이었습니다. 공부는 해야 했고, 재미는 없었습니다. 살면서 재미난 일들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겠지만, 2학년 때까지의 수업 방식과 고3이 되어서의 수업 방식은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기본 교재는 EBS 수능특강, 하반기에는 수능완성이었죠. 이전까지는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더라도 교과서 속 내용에만 갇혀서 공부하기보다는 외부 자료를 다양하게 보기도 하고 수업 흐름도 그렇게 고리타분하지 않았는데. 하긴, 수능을 위해 준비된 교재를 공부하면서 재미있을 게 뭐가 있었겠어요. 심지어는 세특 기재를 위한 심화 발표는 발표를 참 좋아하던 저조차도 재미를 느낄 수 없었을 만큼, 정말 형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아이들이 발표를 끝내고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지만, 쳇바퀴처럼 굴리니까 의욕이 더 안 생기더라고요. 정말 우울해질 지경이었습니다. 과목명은 화려한데 들여다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 수능 교재로 공부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말이죠.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학습 환경 속에서 나름 스스로에게 재미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저에게 그 재미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이었습니다.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습니다. 원래도 서사가 있는 작품이라면 소설, 시, 그림, 영화 등등 가리지 않고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대학 원서를 쓸 시기가 왔고 지망 학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충분히 뚜렷하지 않았던 저에게 고3 시절 문학 수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국어 수업에서 현대문학을 담당해 주셨던 선생님의 수업을 정말 좋아했던 저는, 문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방향을 보다 분명하게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그래도 선생님이 주시는 레퍼런스가 그나마 다양했던 몇 안 되는 수업 중 하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다 못해 스페인어 시간에 문화 수업을 할 때 배웠던 스페인 문학사도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말로 된 문학 작품도, 스페인어권 문학사도 (유감스럽게도 스페인어로 작품을 읽을 실력은 못 되었기에..)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다면 일단 문학 공부는 다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국제고 학생이다 보니 영어 쪽으로 진로를 잡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국어국문학보다는 영어영문학을 지망하게 되었죠.


살짝 다른 이야기지만, 진로 문제를 떠나서 국어 시간에 작품을 배우면서 생각나는 문장들을 글로 옮겨 블로그에 정리해 두는 것은 저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취미 생활이 되어주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최근 국어 시간에 배운 공선옥 작가의 <명랑한 밤길> 수업이 참 좋았어요. 오래간만에 전쟁이 아닌 다른 소재가 나와서 그런가, 어둡고 무게감 있던 기존의 작품들보다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

마치 <달밤>을 배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들의 이야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달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명랑한 밤길>에서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보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나름의 버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말이죠.

사실 지금 당신과 내가 힘든 시간을 버텨낸다고 해서 앞으로의 현실이 당장 더 나아지지는 못할지도 모르고, 몇 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이 마땅히 없을지도 모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정말 조금만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명랑한 밤길>에서 그러하듯이 하루하루를 명랑하게 헤쳐나갈 힘만 우리에게 있다면, 그날 하루치 행복은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요.

명랑하다는 말은 참 귀여운 말인 것 같습니다. 발랄한 것보다 아기자기한 느낌이고, 긍정적인 것보다 조금 더 기분 좋은 말인 것 같아서, 왜인지 그런 동글동글한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어 졌습니다. 서로의 명랑한 하루하루를 응원해 주는 것, 당신이 하루의 끝을 꼭 명랑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남몰래 기도하는 것이 또 하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022.07.01.


사실 이 글은 제 고3 1년을 전부 대변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잘 해내고 싶었고, 입시가 끝이 아닌 줄 알면서도 끝인 것만 같이 느껴졌던 그 시기가 너무 팍팍하게 느껴질지라도 한 줌의 여유는 가지고 사는 인간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수험 생활을 하면서 저의 가장 큰 반항은 그 잠깐의 여유를 누리는 것에 있었습니다. 마음을 명랑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나 할까요. 가령 이런 거죠.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겨서 교실로 등교하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문제집을 펴놓고 혹은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틈에서 괜한 오기를 부렸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것은 공부일지언정 밥을 먹고 와서 1교시 전까지 교실에서 보내는 20-30분가량의 시간만큼은 쉬겠다. 그 시간만큼은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니라 읽을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했습니다. 나름 합리화시키기 위해 ‘어차피 독서 기록을 위해서라도 책은 읽어야 하니까’하고 생각했죠. 물론 2학기에 접어들면서는 그 시간에 저도 공부를 했지만, 적어도 3학년 1학기까지는 독서가 등교하고 나서의 첫 루틴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담임 선생님도 ‘책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시면서 졸업할 때까지도 그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조회 때문에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가 문제집 대신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속 터지지 않으셨을까 싶기도 합니다. 뭐, 물론 제 인생이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저에게는 아침 시간 동안 가지는 잠깐의 독서 시간이 지긋지긋한 줄 세우기식 입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습니다.




여름. 슬슬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시즌이 왔습니다. 당시 3학년 부장을 맡고 계셨던 선생님(편의상 A선생님이라고 하겠습니다)은 자소서 첨삭 부탁하러 오면 봐주겠다는 공지를 하셨었고, 상당수 친구들이 선생님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A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내신 성적이 애매했던 제가 수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지원하고자 했던 대학들은 당시 제가 느끼기에 저희 학교에서 잘 갔다고 인정해주지 않을 것만 같은 대학들이었거든요. 간다면야 나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라인에 간다는 것이 우수한 성적은 아닌. 고려할 수는 있지만, 메이저 급은 아닌. 게다가 A선생님은 수업을 잘하신다는 것과 별개로 저처럼 애매한 성적의 학생은 묘하게 위축되게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2학년 때부터 저희 기수를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음에도 당시 저에게는 상담하기에 편한 마음이 드는 선생님이 아니었고, 구조적으로 학생의 성적에 따라 케어되는 정도가 달라지는 건 학교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으나 굳이 A선생님과 제 입시 문제로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정도로만 이야기해두겠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학업 성적이 좋은 축에 들었던 친구 한 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가 A선생님께 함께 가자고 계속 이야기를 하길래, 별 수 없이 같이 따라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어느 대학을 쓸지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동안에도 제가 옆에 있었고, 제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친구가 옆에 있었습니다. 친구가 꿈꿀 수 있는 대학과 제가 말한 대학은 ‘레벨’이 달라서, 선생님은 뒤늦게 저를 친구와 분리시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노트에 적힌 제 이름과 지망 학교, 학과를 보았지만 제가 계속 먼저 찾아가지 않는 이상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 친구는 가만히 있어도 상담하자는 연락을 받고 입시 전략을 선생님과 짜게 되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연락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요. 굳이 아쉬워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다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해 여름은 아이러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원하지도 않았던 교무실 방문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려던 그날,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제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우수생활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괜히 그게 특별하게 느껴져서 혼자 더 씁쓸해했던 것 같습니다. 입시에서의 현실은 쓴맛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자기소개서를 쓰던 그 시기 내내 공부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의욕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대학 간판과 직결되는 것은 아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나는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가 꽤 선명하게 보이고 대학생이 되어 더 재미있게 공부할 자신이 있어도, 고등학교 때 했던 활동들에 의미를 못 느끼는 친구들보다 시험 점수가 덜 나왔다는 이유로 다른 이름의 대학을 써야 했습니다. 그건 살면서 처음으로 패배감이라는 감정을 맛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등학교 마지막 해의 이야기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밀도가 조금 높아서, 두 편에 나누어서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 휴재 공지 +

학기가 시작되어 분주하기도 했고, 다음 주에는 생일 이슈 등으로 한 주 쉬어가는 대신 가벼운 특별외전 느낌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9월의 마지막 주 잘 보내시고,

10월에 만나요!



2024.09.28.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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