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산 있는 싸움을 선택하라

피터 틸이 말하는 R&D 혁신 전략

페이팔과 팔란티어를 창업한 피터 틸의 최근 인터뷰를 보며, 20년간 국가 R&D 과제를 기획하고 평가하며 품어왔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기술 낙관론자도, 냉소적 비관론자도 아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6개월 예상이 10년 걸린 이유


2003년 팔란티어를 창업할 때 틸과 그의 팀은 자신만만했다. 구식 군사 시스템을 대체하는 데 6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10년이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소프트웨어가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은 군 내부 보고서로도 입증되었다. 문제는 10억 달러 규모의 컨설팅 비즈니스와 얽혀 있는 기득권 구조, 그리고 그 보고서를 은폐하라는 내부 지시였다.


결국 틸은 2016년 자신의 고객인 육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주변 컨설턴트들은 모두 떠났다. "고객을 고소하면 끝장난다"는 것이 업계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법정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22년간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고, 2019년 마침내 계약을 따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R&D 과제를 평가할 때 기술적 실현가능성만 따지는 것은 아닐까? 제도적 장벽, 이해관계의 복잡성, 시스템의 저항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을까?


틸의 경험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기술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Can we build it?)만 물을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가(Can we deploy it?), 그리고 시장이 받아들일 것인가(Will they adopt it?)를 동시에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은 모두 나태함으로 향한다


틸이 던진 또 하나의 통찰은 극단적 낙관주의와 극단적 비관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극단적 비관주의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합니다. 극단적 낙관주의자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죠. 특이점이 알아서 해결해주니까요. 결국 둘 다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바로 나태함입니다."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는 매우 낙관적인 제목이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주의는 "팝콘이나 먹으면서 미래가 펼쳐지는 영화나 보자"는 태도를 낳는다. 행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비관주의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안 돼"라는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든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적정 낙관주의'다. 가능성을 믿되, 장애물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 단계별 검증 계획을 세우고, 실패 시나리오와 대안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R&D 과제 평가의 핵심 철학이 아닐까.


모든 싸움을 다 할 수는 없다


20년 넘게 벤처 투자를 해온 틸은 자신의 실패도 솔직히 인정했다. 최악의 성과를 낸 두 분야는 교육 소프트웨어와 헬스케어 IT였다.


왜 실패했을까?


첫째, 너무 많은 경쟁자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헬스케어와 교육은 명백히 망가진 시스템이고, 모두가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달려든다.


둘째, 이해관계자 구조가 복잡했다. 헬스케어의 경우 환자는 돈을 내지 않고, 의사는 결정하지만 역시 돈을 내지 않으며, 보험사와 정부와 병원이 각자 다른 인센티브로 돈을 낸다. 이런 구조에서 혁신은 쉽지 않다.


셋째, 사회적 인기도는 높지만 실질적 돌파구가 불명확했다. 틸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VC 네트워킹 이벤트에서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투자 분야는 의심하라."


반면 팔란티어가 선택한 국방 소프트웨어는 2003년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영역이었다. 명확한 기술적 격차가 있었고, 경쟁이 없었다.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성공하면 엄청난 기회지만, 실패하면 당신이 미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틸은 서핑에 비유한다. "파도가 없는 잔잔한 날 아무리 미친 듯이 노를 저어도 소용없습니다. 파도 바로 앞에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하지만 파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R&D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인기도만 높고 실질적 돌파구가 불명확한 분야, 너무 많은 경쟁자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분야는 피해야 한다. 대신 명확한 기술적 격차가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분야, 제도적 장벽은 있지만 극복 전략이 있는 분야, 시스템 변화의 징후가 보이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AI 만능주의를 경계하라


AI에 대한 틸의 시각도 신중했다. AI가 제조업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AI는 250년 자동화 역사의 연속선상입니다. 양자적 도약이기도 하지만, 마법의 해결책은 아닙니다. 로봇과 장비 비용 대비 효과를 정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환경 규제 등 다른 반산업적 정책도 함께 개선되어야 합니다."


R&D 제안서를 평가할 때 흔히 보는 패턴이 있다. 'AI 기반', '빅데이터 활용', '4차 산업혁명'같은 유행어만 남발하고 실제 기술 내용이 부실한 경우다. 틸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체적인 기술 스펙, 비용-효과 분석, 규제와 인프라 등 생태계 조건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있는지를 봐야 한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조언


인터뷰 말미에 틸은 정부 효율성 부서(DOGE)에 대해 의외로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 이유가 흥미로웠다.


"5년간의 원격근무로 연방 정부 직원 90%가 실제로 일하지 않아도 차이가 없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원래부터 일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AI로 대체할 수도 있고, AI 없이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적 비효율이 누적되면 오히려 개혁의 여지가 커진다는 역설이다.


피터 틸의 가장 큰 기여는 단순한 낙관론도, 냉소적 비관론도 아닌 '전략적 현실주의'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혁신의 가능성을 믿지만, 시스템적 저항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기술적 우수성을 추구하지만, 실행의 정치경제학을 이해한다.


국가 R&D 전략을 기획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균형 감각이 아닐까.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올바른 문제를 선택하고, 제대로 된 전략으로 접근한다면, 10년이 걸리더라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


틸의 말처럼, 파도를 기다리되, 노를 젓는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승산 있는 싸움을 선택하는 기술이다.


김현철
AI R&D 전략플래너
기계공학 박사 | PMP | Agile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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