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질이라는 질문
어제 밤 늦게까지 팔란티어 한국 지사 서지숙 이사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조회수가 벌써 20만을 향해 가고 있더라. 투자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기업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팔란티어가 정확히 뭐하는 회사야?"라고 묻는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는 달랐다. 투자 관점을 넘어, R&D 전략을 기획하는 내 일상에 깊이 파고드는 통찰들이 있었다. 특히 NRR(Net Revenue Retention) 94%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단순히 194%의 매출 성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번 도입한 기업이 다음 해에도 계속해서 확장하고, 더 깊이 의존하게 된다는 것.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플랫폼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22년간 한 가지 본질을 지켜온 기업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계속 우리 R&D 생태계를 떠올렸다. 지난주 월요일 아침, 또 하나의 기획 회의를 시작하면서 느꼈던 그 묘한 불편함. 우리는 정말 본질에 집중하고 있는 걸까?
서 이사의 첫 마디가 강렬했다.
"팔란티어는 데이터 분석 도구가 아닙니다. 운영 체제입니다."
시장에는 이미 데이터 플랫폼도 있고, 분석 도구도 있고, AI 솔루션도 있고, 시각화 도구도 있다. 그런데 팔란티어는 이 모든 걸 묶어서 "기업 운영 체제"라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경쟁사를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 것이다.
나는 문득 지난달 기획했던 탄소중립 R&D 과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에너지, 수송, 산업, 건물... 이렇게 익숙한 분류에 따라 과제를 나눴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만약 팔란티어처럼 생각한다면 어땠을까. "2050 탄소중립을 위한 국가 의사결정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정의하는 것. 개별 기술 개발이 아니라, 실시간 배출량 모니터링부터 정책 시뮬레이션, 산업간 탄소 거래, 기술 포트폴리오 최적화까지 통합하는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
기존 틀에 맞추는 것과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 그 차이가 혁신과 개선을 가르는 건 아닐까.
투자자들은 온톨로지에 열광한다. 차별점이고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표면에 보이는 기술보다 숨겨진 수백 개의 마이크로서비스가 더 중요합니다."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만 해도 데이터 리니지, 브랜칭, 형상관리... 온톨로지는 그중 일부일 뿐이다. 온톨로지를 만드는 밑단 기술과, 만들어진 온톨로지를 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게 하는 윗단 기술이 모두 갖춰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주 검토했던 AI 신약개발 과제가 생각났다. 예산의 70%가 핵심 AI 알고리즘 개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팔란티어 방식으로 본다면? 알고리즘에 30%, 데이터 파이프라인 20%, 실험 결과 추적 시스템 15%, 규제 대응 자동화 15%, 연구자 협업 플랫폼 10%, 기술이전 지원 10%... 이렇게 배분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나의 뛰어난 알고리즘보다, 신약개발 전 과정을 지원하는 생태계. 그게 진짜 실용화로 이어지는 길이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서 이사의 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거였다.
"연결만을 위한 연결은 하지 않습니다."
에어버스 이야기가 나왔다. 에어버스는 왜 스카이와이즈라는 플랫폼으로 항공사들과 연결했을까? 단순히 데이터 연결이 트렌드여서? 아니다. 비행기 제조 품질을 높이려면 실제 운항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엔진 압력, 날개 상태, 실시간 성능 데이터. 판매 후 보이지 않던 그 데이터들이 더 나은 비행기를 만드는 열쇠였다.
목적이 먼저고, 연결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지난 분기 참여했던 반도체 R&D 연합 기획 회의가 떠올랐다. "산학연 협력이 중요하니까 일단 컨소시엄을 만들자"는 분위기였다. 좋은 기업들, 좋은 대학들 모으면 뭔가 나올 거라는 기대.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만약 목적부터 시작한다면? 차세대 2nm 공정 상용화를 2년 앞당긴다는 명확한 목표. 그러려면 설계 단계 문제를 소재 개발에 실시간으로 피드백해야 한다. 현재 6개월 걸리는 걸 2주로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공정 장비 최적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해야 한다.
이제 필요한 연결이 보인다. 그리고 각 주체가 왜 참여해야 하는지, 뭘 얻는지도 명확해진다.
회의실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우리는 형식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려 하는 건 아닐까. 반대로 해야 하는데.
팔란티어가 22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지킨 것. 그건 "문제 해결"이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미션이었다.
서 이사는 조직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확장성과 매출 압박 속에서도 본질에 투자한다는 것. FDE(Forward Deployed Engineer)라는 독특한 직군이 있다는 것. 현장에 파견되어 진짜 문제와 씨름하는 엔지니어들. 수요가 아무리 많아도 채용 기준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금요일 오후 받았던 전화가 떠올랐다. 한 과제 담당자가 전화로 물었다. "이번 평가에서 논문 몇 편 나왔는지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실제 현장 적용 가능성이 중요한가요?"
나는 순간 대답을 못했다. 제도상으로는 둘 다 중요하다고 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는 어디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을까? 연말이면 논문 편수, 특허 건수, 기술이전 건수를 세고 있지 않은가.
팔란티어의 FDE들은 현장 경험이 플랫폼으로 역류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본 문제가 제품 개발 방향을 결정한다고.
우리 R&D 생태계는? 현장과 연구실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될까. 연구자들은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풀고 있을까, 아니면 평가받기 좋은 문제를 풀고 있을까.
월요일 아침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
AI FDE. 팔란티어가 개발한 이 개념이 흥미로웠다. AI로 FDE를 없애는 게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를 한다.
첫째, FDE가 전략과 설계에 집중하도록 반복 작업을 자동화한다. 둘째, 고객사 내부에 자체 FDE 조직이 생기도록 돕는다. 노바티스처럼 조직 DNA 자체가 변할 수 있도록.
확장성과 본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이었다.
나는 지난달부터 생성형 AI를 R&D 기획에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PMP와 Agile 전문가로서 프로젝트 관리에 AI를 어떻게 접목할까, 기획서 작성을 얼마나 자동화할까... 그런 생각들.
하지만 팔란티어를 보고 깨달았다. 잘못된 질문이었다.
AI는 기획서를 대신 써주는 도구가 아니다. 내가 더 깊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증강 도구다.
예를 들어 6G 이동통신 전략을 수립한다고 해보자. 전 세계 6G 특허와 논문을 분석하는 데 보통 2주가 걸린다. AI를 쓰면 3일이면 된다. 그럼 나머지 11일은? 산업계 심층 인터뷰에 쓴다. 현장에 간다. 전문가들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
기술동향 조사에 쓰던 주당 20시간을 5시간으로 줄이면, 15시간을 전략적 분석에 쓸 수 있다. 선행연구 검토 15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면, 11시간을 핵심 전문가 인터뷰에 쓸 수 있다.
총 45시간 중 34시간을 진짜 본질적인 사고에 쓸 수 있게 된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생각했다. AI는 내 일을 빼앗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게 해주는구나.
인터뷰를 보고 나서 주말 내내 생각했다. 결국 본질에 대한 끈질긴 집중. 그게 답이구나.
추상적인 깨달음에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 뭘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세 가지를 정했다.
첫째, 다음 과제 기획할 때 질문을 바꾼다.
"AI 기반 ○○ 기술 개발" 이런 제목이 아니라. "이 기술이 만들어갈 산업 생태계는 무엇인가?" 이 질문부터 시작한다. 3~5년 후 변화된 산업 구조를 먼저 그려본다. 한 줄짜리 과제명이 아니라, 풀고 싶은 진짜 문제를 정의한다.
둘째, 회의록 맨 위에 세 가지 질문을 적는다.
"왜 이 연결이 필요한가? (목적)"
"각 주체가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 (인센티브)"
"연결이 성공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성과)"
산학연 협력, 컨소시엄 구성 논의할 때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으면, 그건 형식적인 연결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매월 하루는 현장에 간다.
FDE처럼 파견될 순 없어도, 한 달에 하루는 연구실과 사무실을 벗어난다. 과제 수행 기업 생산라인에 간다. 최종 사용자를 만난다. 현장 전문가와 비공식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PPT와 보고서에는 없는 진짜 문제가 현장에 있다.
인터뷰 말미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서 이사는 한국 시장의 두 가지 특징을 꼽았다.
본질적인 평가 기준. "결과가 나오면 된다." 미사여구보다 실제 성과. 그리고 트렌드에 대한 민감성.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문화.
생각해보니 이건 한국 R&D 생태계의 강점이다. 형식과 절차보다 실질적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것. 혁신적 방법론을 빠르게 수용하는 것.
문제는 균형이다. 단기 성과 압박과 장기 본질 추구 사이의 균형. 빠른 성과와 깊은 통찰 사이의 균형.
팔란티어가 22년간 그래왔듯이. NRR 94%가 증명하듯이. 본질을 지키면서도 성장할 수 있다.
새로운 방법론은 넘쳐난다. 트렌드는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R&D 전략가로서 내가 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정말 해결하려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본질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가?
팔란티어는 한 번 도입한 기업이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계속 확장하고 싶어 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NRR 94%는 그 증거다.
국가R&D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술이전 받은 기업이 3년 후에도 그 기술로 매출을 늘리고 있는가? 한 번 참여한 기업이 다음 사업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하는가?
진짜 성공은 과제 종료 이후부터 시작된다.
월요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기획 회의 화이트보드 맨 위에, 이 세 가지 질문을 적어봐야겠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제도나 예산이 아니라, 본질을 향한 단순하고 끈질긴 질문인지도 모른다.
김현철
AI R&D 전략플래너
기계공학 박사, PMP & Agile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