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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다이달로스를 위하여

산림치유 현장 입문기

by 고산골 산신령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MZ’다. 거침없이 자신이 원하는 걸 향해서, 그리고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즘의 세대와는 딱 어울리는 신화 속 주인공이다. 이카로스는 덕분에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보다 훨씬 더 주목받는 캐릭터가 됐다. 이카로스의 거침없는 도전에는 그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가 있어 가능했다.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가둔 미궁을 만든 뛰어난 건축가이며 발명가다.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미움을 사,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히게 된다. 미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함을 아는 다이달로스는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을 날아 탈출한다. 이카로스가 ‘태양 가까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하늘을 새처럼 날자’는 인류 꿈의 시작은 이카로스의 추락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카로스의 도전에는 다이달로스라는 든든한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이달로스를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필자는 최근 산림치유지도사로서 데뷔했다.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성서노인종합복지관 회원들을 대상으로 와룡산에서 실시한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찾아가는 산림치유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주 강사로 나선 거다. 그동안 몇 차례 산림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프로그램 진행을 돕는 보조강사 역할을 그쳤다. 보조강사는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눈치껏 몸을 움직이면 되지만, 주 강사는 참여자들과 서너 시간 호흡을 함께 하며 산림치유의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매조짐까지 다하기 때문에 상당한 역량이 요구된다.

경력이 짧은 필자는 당연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주 강사 선생님은 매번 꽁무니를 빼는 필자의 모습이 안타까웠지, 주 강사 역할을 강요(?)했다. 그의 강요에 못 이겨, 와룡산 산림치유 5회차 가운데 4~5회차는 주 강사로 나서기로 덜컹 약속했다. 이 결심에는 일본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의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도 한몫했다. 그는 책에서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집에서 아무리 연습 해본들 의미가 없다. 현장이 최고의 연습”이라며 필자의 행동을 촉구(?)했다.

산림치유 주 강사 첫 경험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걸 실감 나게 했다. 참여자의 공감을 이끌기 위한 세밀한 진행이 부족했고, 시간 안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성공을 말할 수 있는 ‘악마적 요소’가 없었다는 얘기다.

다행히 필자에게는 노련한 다이달로스 선배가 있었다. 그녀는 참여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적절히 ‘치고 빠지는’ 노련함으로 프로그램 진행에 개입했다. 이카로스의 도전에는 다이달로스의 역량이 중요했음을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덕분에 성서노인종합복지관 회원들이 “와룡산 산림치유 프로그램 상설화‘를 최근 복지관 식당 층축에 따른 이태훈 달서구청장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건의했다고 한다. 와룡산에서 개최된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찾아가는 산림치유 아카데미’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숲속에서 일상을 즐기는 산림치유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한 결과인 것 같다.


숲도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다이달로스 같은 멋진 뒷배의 역할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까시나무 싸리나무 같은 나무들을 애물단지 잡목으로 여긴다. 전 국립수목원장을 지낸 신준환 교수의 책 <다시, 나무를 보다>를 보고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민둥산이나 황폐해진 숲을 다시 우거지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시나무 싸리나무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훼손한 산림에는 아까시나무나 싸리나무처럼 토양이나 기후조건에 상관없이 잘 자라는 나무를 먼저 조림, 산의 토양을 먼저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산림토양이 좋아지면 이 나무들은 질소고정을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라고 설명했다. 아까시나무는 숲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다이달로스 같은 존재이지 애물단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는 다이달로스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치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승자독식’의 논리에 빠져 여야 모두 다이달로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물론 각종 단체나 사적인 모임에서도 잘못된 ‘승자독식’ 논리에 빠져 있는 듯하다. 상생과 협력을 입에 달고 있지만, 실질적인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이달로스 같은 존재가 든든히 바치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나의 성장을 위한 다이달로스’라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우리들의 다이달로스를 위하여’를 외치는 열린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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