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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숲

by 고산골 산신령

최근 영주 국립산림치유원 산림치유 프로그램에 2박3일 일정으로 참여했다. 우선 좋았다. 영주 국립산림치유원이 깊은 산속의 숲이 울창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다, TV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터진다’는 와이파이는 아예 잡히지도 않는 곳이었다. 숙소 방마다 ‘문명의 이기와 잠시 멀어지라’는 안내 문구도 좋았다. 산림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걷고 책읽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그곳에서 체험한 산림치유 프로그램은 “여기까지 와서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치유 프로그램의 잘잘못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2박3일 동안 준비한 프로그램이 모두 실내(체험관, 명상실, 산림치유센터 등)에서 이뤄져 참석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마치 산림치유원의 화려한 시설과 외관을 자랑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것처럼 생각되게 만들었다. 특히 아름드리 목재로 로마 판테온 신전의 돔처럼 만든 명상실에서 체험한 ‘싱잉볼 명상’은 그런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판테온 신전처럼 화려한 돔 천장 아래에서 명상을 체험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게 아닐 것이다. 울창한 숲에서 바람 소리, 계곡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스로 돌아보는 명상을 경험하고 싶어서 먼 그곳까지 발품과 시간을 판 거다.

한마디로 ‘도둑맞은 숲’에서 산림치유를 체험한 거나 마찬가지다.


산림치유의 정의를 여기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산림치유의 법적 정의는 “향기, 경관 등 자연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을 증진 시키는 활동”으로 정의한다고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 제2조에 규정하고 있다. 산림청의 행정적 정의 역시 “자연환경 중에서 숲이 가지는 다양한 물리적 환경요소(경관, 테르펜, 음이온 등)를 이용하여 인간의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자연요법으로 인체에 미치는 생리적ㆍ심리적 효과를 과학적, 의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체계적 프로그램을 통해 검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산림을 심신치유에 활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산림치유가 발달한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고 한다. 최근 일본의 산림치유 현장을 체험하고 온 산림치유지도사들은 한결같이 “이 숲 저 숲을 거닐며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 대구시산림녹화팀장인 김태규 산림치유지도사 역시 “산림치유 선진국의 프로그램은 인위적인 요소를 최대한 걷어내고 참석자들을 숲속에서 걷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게 특별했다”고 말했다. 이들 나라는 운동시설, 휴게시설, 명상시설 같은 인위적 시설을 최대한 억제하고 산림치유 관련 시설을 조성한다는 거다. 그는 10여 회에 걸쳐 일본 등 산림치유 선진국의 현장 체험을 다녀온 산림치유 정책 전문가다.

대구시는 지난 6월 시민들의 건강증진과 산림치유 문화 활성화를 위해 ‘최정산 힐링숲’을 조성,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최정산 700m 고지에 조성된 힐링숲은 편의시설 등 각종 시설이 거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근무하는 산림치유지도사들은 “너무 좋다”고 말한다. 산림치유 본질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오롯이 숲속 환경을 이용한 산림치유에 충실할 수 있어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어느 치유시설보다도 높다고 한다.

국립 산림치유원의 ‘산림치유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산림치유 프로그램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국립숲체원은 물론 전국 지자체마다 조성하고 있는 치유의 숲에서는 국립 산림치유원의 ‘산림치유 프로그램’이 표준 매뉴얼이나 다름없을 거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갖는 힘 때문이다. 영주 국립 산림치유원의 치유 프로그램에 이렇게 장황하게 유감을 표하는 이유다.

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의 방점은 제대로 찍어야 한다. 산림치유 방점이 숲이 아니라 화려한 시설에 찍힌다면 우리의 산림치유 나침판은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AI의 시대다. 산림치유도 AI의 도움을 받는 시대가 이미 왔다. 산림청 등이 공동 주체한 디지털 숲, 정원 전시회인 ‘세컨포레스트’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이 관람할 정도로 서울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회는 MZ세대들의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숲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지털 숲, 정원 전시회이면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정책일 거다. 그러나 얼마든지 숲을 즐길 수 있고, 숲속에서 오롯이 스스로 치유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디지털 속에 갇혀서 즐긴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전시회다.

필자는 아침마다 앞산을 한 바퀴 하면서 잣나무단지에서 커다란 나무를 껴안고, 기대며 서로 대화하는 60대 여성을 자주 만난다. 그녀가 나무와 스킨십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는 물어보질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녀는 볼 때마다 ‘그 나무와 대화’하는 걸 봐서는 틀림없이 많은 치유를 얻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매일 나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할 이유가 없을 거다.

나의 앞산 한 바퀴는 고산골 용두토성에서 시작한다. 용두토성에 올라서면 새벽이어도 도시의 각종 소음이 잔뜩 묻어 있다. 토성 위를 걷다 불과 몇 미터 아래로 내려서면 희한하게도 소음은 차단된다. 그게 자연인 것 같다. 인위를 가능한 배제한 자연에, 숲에 방점을 찍는 게 산림치유의 핵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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