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단풍이 막바지에 이른 날 고산골(대구 앞산 자락)을 내려오다 마주한 행복했던 기억이다. 고산골 임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붉고 노란 단풍나무가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연스레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오셔서 “단풍 정말 이쁘지요?”라며 말을 걸었다. 너무 이쁘다고 화답했더니, “내가 심은 단풍나무”라고 했다. 소문으로 들었던 고산골 ‘단풍나무 할아버지’를 비로소 만난 거다.
고산골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엮은 필자의 <새벽산행 3,650일의 기록, 숲과 대화할 시간입니다> 책을 지난해 출간하고서 주변으로부터 아쉽다는 한마디가 이분의 이야기였다. 책에 고산골 ‘단풍나무 할아버지’ 이야기가 들어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는 말을 몇 분에게서나 들었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팔순 기념으로 고산골에 단풍나무 5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매일 하루 2~3그루의 단풍나무를 직접 땅을 파서 심고, 일일이 물을 주며 온갖 정성을 다했다는 거다. 무려 1달 걸쳐 땀 흘린 끝에 나무를 심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나무를 심는데 만 그치지 않고 매일 아침 고산골을 걸으며 단풍나무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고서 가꾸었다고 한다. 나무마다 지지대를 설치하고, 심지어 지난 가을에는 공원관리사무소가 임도 제초작업을 하면서 자신이 심은 단풍나무 하나가 잘려 나간 것을 발견하고서 다시 심을 심었을 정도로 정성을 쏟는다.
이 단풍나무는 고산골 단풍 가운데 유난히 아름답고 오래도록 알록달록함을 유지하고 있어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연히 시민들은 그 단풍에 눈길을 한 번 더 주고, 사진도 열심히 찍으며 즐거워한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한다는 걸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아흔의 노인이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 고산골을 걸으며 단풍나무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고, 그 나무를 보고서 행복을 느끼는 시민들을 보고서 자신도 행복을 느끼며 일상을 보내는 ‘행복의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 같다. 10년 전 심은 단풍나무를 통해 적어도 매일 한 번씩 행복을 되새김질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4년 행복하셨습니까?”
며칠 남지 않은 2024년도를 마무리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해 보았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필자는 올해 행복할 수 있는 요소들이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퇴직과 교통사고 등으로 오히려 우울할 요인은 수두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올해도 행복했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 한껏 요염함을 보일 때였다. 앞산 한 바퀴를 하면서, 능선에 늘어선 벚나무 버찌를 한없이 따먹은 적이 있다. 해마다 봄이면 하는 의례적인 놀이 같은 것이어서, 그날의 기억을 ‘행복 리스트’에는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을 읽다가 버찌를 따 먹는 일이 행복한 것임을 발견했다.
헤세는 “한 번만이라도 다시 젊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속받지 않은 채 뻔뻔하게 호기심에 차서 세상으로 떠나고, 배가 고파 길가에서 버찌로 식사를 하고, 갈림길에서는 윗도리 단추를 헤아려 ‘오른쪽 왼쪽’을 정하고 싶구나!”라고 썼다. 적어도 헤세가 그렇게 하고 싶은 ‘버찌로 배 채우기’를 필자는 거의 매년 즐기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거다.
‘행복이란 매끼의 밥에서, 늘 입는 옷에서,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에서 느껴야 하는 일상의 상태다.’ 최준식 교수는 <행복은 가능한가> 책에서 설명한다. 즉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행복을 향유 해야 한다는 거다. 일상 삶에서, 매일 행하는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테세우스는 조국 아테네를 위해 크레타 미궁에 갇힌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는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크레타 왕국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준 검은 실타래 공 덕분이다. 테세우스는 미궁 속으로 들어가면서 실타래를 풀어 두었다가, 그 실을 그대로 따라 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그렇게 원하고 바라는 행복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따라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거다. 그러나 행복은 수많은 사람이 행복론을 펼치며 많은 실타래를 던져두었지만, 그걸 따라만 가서는 결코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
행복은 미로 속에 숨어 있는 조그만 보석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람의 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은 모습으로 미로 속 곳곳에 감춰져 있다. 눈 맑은 이들이 세심하게 찾아야만 겨우 눈에 띄는 보석이다.
최근 대학의 연구소가 발표한 2025년 트렌드 가운데 하나가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를 꼽았다. 삶에서 특별한 경험이나 특별한 성취, 목표 달성 없이도 평범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게 2025년의 핵심 키워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곳곳에 숨겨져 있는 ‘행복이라는 보석’을 찾고, 발견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의 값진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년에도 숲을 걸으며 행복 감수성이 아주 높은 숲속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며 얘기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할 생각이다. 행복 하려면 행복 감성이 풍부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아주 좋다. 필자가 고산골 단풍나무 할아버지를 내년에는 더 자주 뵈어야 할 이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