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낮잠- 빨간 소파(2)

by 스티키 노트

낮잠-- 빨간소파(2)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이 문제적 빨간소파를 독차지하기 위한 우리 세식구의 갖은 음모와 암투는, 치명적인 낮잠이 되어 주말 오후의 세 영혼을 집어 삼키곤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께름직하고도 수상한 이 뻘건 물건을 내 진즉에 치워버렸어야 했으나.... 애초부터 이 물건을 사들이기 위해 박박 우긴 장본인이 바로 나였던 까닭에 차마 그럴수도 없었다.


이 깜찍한 3인용 소파는 우리집 거실로 진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오리의 꼴사나운 밀회장소이자 오붓한 낮잠의 주무대로 둔갑해 버렸다. 나는 전부터 이 소파에서 벌어지는 볼썽 사나운 낮잠 퍼레이드에 대해 한번쯤 나의 독자들께 그림으로 소개드리고 싶었었다. 아니 고발하고 싶었다. 나는 난데없이 내 인생에 난입한 저 미모의 개자식에게 남편을 홀라당 빼앗겨 버린 이후로, 주말마다 그 둘 사이에 겨우겨우 꼽사리 껴서 낮잠을 청하곤 한다. 그러므로 위의 저 그림은, 그런 나의 뼛속깊은 서러움과 외로움의 예술적 승화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갸륵하다. 스티키 노트.


할말이 없다. 원흉은 바로 나였고 모든것이 나의 불찰이었다. 오갈데 없이 덜덜 떨고 있던 저 녀석을 집에 들인것도 나였고, 가구매장 구석탱이에 외로이 놓여있던 저 시뻘건 소파를 집에 들이겠다고 몇날 몇일을 박박 우겨댄것도 나였다. 나는 본전에 연연하지 말고 진작 저 수상한 물건을 내다버렸어야 옳았다. 어쩔수가 없다. 마가 꼈다. 내 남편과 오리자식이 저 소파를 배경으로 내 눈앞에서 이토록 놀라운 금슬을 자랑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인생아.....인생아.....하아......


무릇 월급쟁이의 주말이란 나른한 낮잠이 한자리를 떠억 차지하고 있어야 제맛인 법. 한 남자와 내연의 개, 그리고 그 남자의 와이프인 나. 어쩌다 내 인생이 요따위 아메리칸 스타일로 꼬여버린건지. 이 셋이 뒤엉켜 혼곤한 낮잠에 빠져드는 이 시간이야 말로, 외벌이로 고단한 남편이 유일하게 에너지를 풀충전하는 시간이며, 결코 양보할수 없는 주말의 달콤함이다.

첨엔 아저씨와 메밀베게를 정답게 나누어 베던 녀석이었다.

우리집 노견께서도 뭇 강아지들이 그러하듯 아저씨의 몸 어딘가에 제 몸을 착 붙이고 잠을 청한다. 절대 아무곳에나 제 몸을 눕히지 않는 않는 저 왕싸가지는, 첨엔 아저씨와 메밀베게를 정답게 나누어 베다가, 겨드랑이와 오금과 허벅지로 슬슬 옮겨 타더니 결국 아저씨의 사타구니까지 기어내려가 나의 분을 촉발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집착견'인 오리가 낮잠을 자면서 '유일하게' 나를 찾을때가 있다. (할렐루야~!) 이리저리 뒤척이던 내가 옆으로 돌아누워 새우잠을 자기 시작할때가 바로 그때이다. 언제든 내가 옆으로 눕기만 하면 어떻게 알고 바로 달려오는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이녀석은 나의 뱃살에 유난히 집착을 한다. 얍삽한 자식. 인간의 내장지방의 두께를 순식간에 감별해내는 재주가 있단 말씀이야. 내가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구부정하게 말고 있으면, 공사도 다망하시지, 어르신께서 어찌 아시고 저 멀리서 득달같이 달려오신다. 나의 두툼한 뱃살과 새우잠 포즈가 만들어낸 이 움푹하고도 푹신푹신한 공간으로 쏙 들어온다. 그리고는 나의 배에 한껏 기대어 제 몸을 쓰윽 눕힌다. 제 몸을 뚱그렇게 말고서 찰떡처럼 내 몸에 붙어 자리를 잡는것이다. 그러면 나도 최대한 새우처럼 몸을 옹그려, 오리를 쏘옥 감싸 안는다. 이 눈부신 밀착을 보아라. 깻잎이다. 틈이 없다. 설사 테트리스의 지존이 온다해도 이 정도로 스키니하게 끼워 맞추는건 불가능하다구!

뱃살방석 1.jpg 내가 새우잠 포즈를 취하면 오리는 내게로 와 찰싹 달라 붙는다. 우리 둘의 유일한 초밀착 타이밍이다.

오리와 나는 찰싹 달라붙어 가만히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그 고요한 순간에 오롯이 들리는건 오리와 나의 나즈막한 숨소리뿐 . 오리는 잠들지 않은채 눈을 껌뻑이며, 천천히 들락날락하는 이 아줌마의 풍만한 뱃살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 나또한 그런 오리를 조용히 바라본다.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오리가 무얼 떠올리고 있을지 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오리가 나에게 오기 전인 갓난 강아지 였을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눈도 못뜬 오리를 품고 있었을 '진짜 엄마'의 품. 엄마가 숨쉴때 마다 가만히 들락날락 하던 푹신푹신한 뱃살, 보들보들하게 불어 있었던 엄마의 젖, 궁광궁광 엄마의 심장소리. 어렴풋한 기억일지라도 오리 맘속에 깊히 새겨져 있을 그리운 엄마의 냄새. 눈도 못뜬 오리를 따스히 핥아주었을 엄마의 부드럽고 촉촉한 혓바닥. 단 한 순간도 잊었을리 없는 기억들. 또 기억들.


물론, 겁을 상실한 남편은 나의 낭만적 추론에 순순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푹신푹신한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오리가, 아줌마의 풍만한 똥배쿠션에 잠시 맛들린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한결같이 펼치고 있다. 뭐지? 선전포고인가? 그는 이딴식으로 우리들의 평탄했던 결혼생활에 돌이킬수 없는 파란을 일으킬 작정인것인가. 그래 이판사판이다. 당장 전쟁을 시작하........ 그러나 그가 오늘날 나와 오리, 이렇게 우주에서 온 궁극의 백수를 둘이나 먹여 살리고 있는 현실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여러가지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때, 남편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편이 내가 불우해 지지 않는 길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큰일날 뻔 했다.)


누군가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오리를 일찍부터 엄마와 떨어트려 놓았을게 뻔하지만, 오리는 분명 그 젖내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향수처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 엄마의 느낌. 단 한번도 잊은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 부끄럽지만 이 아줌마가 복부 비만 집착견인 발칙한 너에게 기꺼이 뱃살방석이 되어줘 보도록 할게. 이 아줌마의 탁월하고도 남다른 내장지방이, 고퀄의 개방석에 단단히 맛들려 버린 너에게 어쩌면 인생 쿠션이 되어줄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질펀한 이 아줌마의 똥배에 파묻혀 한참을 자고 일어나면, 네 어린날의 사무친 그리움도 무서웠던 일들도 모두 다 잊을수 있을것이야. 이제부터 아저씨와의 애정행각일랑 집어 치우고, 너에게 아낌없이 똥배를 내어주는 이 아줌마와의 미래를 한번 설계해 보도록 할까? 어디가니? 오리야?


낮잠8브런치3.jpg (제목: 숨은 오리 찾기)--유성펜. 메밀베게로 시작하여 겨드랑이,등,배,허벅지로 슬슬 옮겨간 오리의 집착은 결국 남편이 사타구니로 귀결되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고야 말았으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