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
오리는 우리집에 얹혀산지 불과 넉달만에 그 어렵다는 '수렴청정'을 시전했다. 나는 애저녁에 오리가 크게 될 놈인걸 알아봤지만, 이토록 순식간에 이딴 경지까지 오를줄은 상상도 못했다. 뭇 개첩들 하는짓이 다 그러하듯 소소한 베갯머리 송사가 그 출발점이었겠으나, 결국 오늘날 이런 엄청난 결말을 맞이하게 된것은 남편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로부터 착착착 전개되어 십삼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 이어져 내려온 이 격동의 시스템은, 결국 멍청한 주상전하와 그 애첩이 벌인 패착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나라꼴 아니 집안꼴이 엉망이 된것은 말할것도 없다)
처음에 이 개자식이 나에게 저지르는 만행이라고는 야비한 첩질이 전부였다. 이 머리 안 검은 짐승을 내손으로 거두어 집에 들인지 불과 3개월만에, 나는 단숨에 곳간 열쇄를 빼앗긴 정실부인으로 전락했다. 졸지에 '뒷방신세'도 서러웠지만, 더 서러운건 이 어이없는 꼭둑각시 노릇이었다. 놀랍게도 이 오만방자한 미모의 생명체가 개첩질에 이어 급기야 섭정을 시전한 것이다. 이 가공할 만행을 허용한건 다 우리부부의 나약한 무의식이었겠지만, 이 쪼맨한 개자식의 검은 속내가 인간의 무의식에까지 스물스물 손을 뻗칠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었다.
개 주제에 인간의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할수있는 일의 결정판. 수. 렴. 청. 정.
자 이제부터 갑질의 진수, 가스라이팅의 결정체, 만행중 최고봉이라 할수있는 개수렴청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사실 고르고 골라 '수렴청정'이라는 매우 점잖은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한심하다. 남편과 내가 마치 최면에 걸린것처럼 '어어어~' 무언가에 홀린듯 행동하고 난 뒤 정신을 차려보면, 오리는 이미 우릴통해 사리사욕을 한껏 채운 뒤였다. 어이상실이었다. 대의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고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모든일은 벌어진 후였다. 모든것은 돌이킬수 없는 상황일때가 대부분이었다. '혹시 이자식이 나한테 최면을 거나? 엇! 뭐야~!!! 내가 닭다리를 언제 다 내준거지~??? 아니 이자식이~!!!!!'
모든게 그랬다. 먹는일도 자는 일도 사는일도 어느하나 개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게 없었다. 이 무슨 어이없는 시츄에이션인지. 이 교활한 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벼운 턱짓이나 눈빛 하나만으로 우릴 원격조종하고 있었다. "아니 이자식이~!!!" 하며 정신을 차리고 참교육을 시행하려다가도 갑자기 장화를 신고 나타난 오리와 3초간 눈을 마주치고 나면, 어느새 우리의 자아는 흐물흐물해지고, 남은것은 오리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의 손과발. "간식 가져와봐. 아니아니 그쪽 서랍말고! 그 아랫서랍에 있는거! 그렇쥐~!!! 나 취향 까다로운 개야. 아무거나 막 입에 대고 그러는 캐릭터 아니라고. " 이 드글드글한 욕망의 화신 같으니. 제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찌 그리 기호에 딱 맞는 식생활을 골라 하시는지. 우리부부의 손과 발은 뭐에 홀린듯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싯적부터 남편과 나의 머리꼭대기는 근석의 놀이터였던 셈이다. 이게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우릴 가스라이팅하는것으로도 부족해서 아예 대비마마 노릇을 시작한 것이다. 건방진 자식. 지가 무슨 서태후인줄 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 둘 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저 순진한 표정과 아련한 눈망울로 완전무장한 녀석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고 우쭈쭈쭈 둥개둥개를 하였으니 이제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교활한 녀석의 미친 미모에 눈이 멀어, 알고도 속아준 그 세월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물인것을. 오리의 마음은 제 불운했던 과거로부터 놓여난지 오래이건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여적 그 생생한 기억을 붙들고 놓아주지 못한 탓이다. 십년도 더 지난 그 아린 기억을 오리처럼 자연스레 떨쳐내어야 마땅하건만, 이상스럽게도 그게 잘 안되는 이유는 뭘까. 버려진 채 공포로 가득했던 녀석의 처음 눈망울을, 우리 두사람의 마음속 뿌리에서 차마 다 지워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껏 지가 사람인줄 아는 개나 고양이는 내 여럿 봤지만, 이런 악질반동은 진정코 처음이다. 그뿐이 아니다. 침대에서 함께 자는 우리 셋은, 우리부부가 우선적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던 초반과는 달리, 이젠 오리가 먼저 침대에 자리를 잡은뒤에야 우리의 미천한 육신을 침대에 눕힌다. 개님의 편안한 잠자리에 행여 누가 될까봐 우리 둘다 침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구겨진채 자는 것이다. 우리가 왜 그러는 것인지는 우리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시작된 일이다.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자는일은 애저녁에 포기했다. 그나마 나는 개첩이 얄미워 내 이불을 제대로 사수하고 자는 편이지만, 정신세계를 온통 잠식당한 내 남편은 한겨울에도 애첩을 위해 자신의 이불을 전부 내어드리고 난 뒤, 겨우 끄트머리를 얻어 걸치고 주무신다. 것도 침대 한 귀퉁이에서. 이것은 인간인가 빙구인가.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며, 언제부터 이렇게 조종 당하기 시작했을까.
더 소름 끼치는건 이렇게 치욕적인 삶을 살면서도 치욕을 못느낀다는 점이다. 설움을 설움이라 여기지 못하도록 초강력 수퍼파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치욕은 커녕 남편은 오리와 눈만 마주치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어응~ 울애기~어응 어응 어응 어응 그려그려 내새꾸~ 어구어구"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흉내내기도 민망한 저 요상한 물개 소리는. 남편은 이 피폐해진 정국의 안정을 위해 시급히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래서야 어찌 이 가정이 제대로 유지가 될수 있단 말인가 . 개인과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서거늘. 남편이라는 작자가 시대의 아픔을 망각한채 개첩따위에게 휘둘려 살고 있다니.... 시대정신? 그딴거 물건너간지 이미 오래다.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것인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문제를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번쩍이는 반사판을 턱밑에 받쳐들고 장화를 신은채 나타난 저 무지막지한 생명체. 개아련 눈깔을 장착한 저 시키가 도대체 무엇이관대 남편은 이다지도 절절맨단 말인가. 늙어서 등털이 듬성듬성해진 노첩을 위해 한여름에도 손바닥만한 개 난닝구를 사들이며 한없이 기뻐하는 저 남자는 과연 예전 그 스마트했던 내 남편이 맞단 말인가.
이게 다 저 요망한 늙은개 때문이다. 이젠 내 호령따위 통해먹지도 않겠지만 반드시 너의 야욕을 단죄하고야 말리라. 내 이제 추상같이 너에게 명하노니 너의 본분을 망각한 이 욕망의 행각을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이 호랑말코같은.... 네??? 간식요?? 아 고구마말랭이요?? 어머 오늘따라 달달한게 땡기시나보다~ 호호호 니예 니예~!! 금방이면 됩니다요~!!!
암요. 그렇다마다요. 이미 다 눈치 채셨겠지만 제가 쓰고자 하는 책의 제목인 '머리꼭대기'는, 이 이야기 14화 '수렴청정' 에서 비롯된 제목 입니다. 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우리집 잔머리 대마왕 '오리'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시작된 이야기이지요.
다음주 15화에서는 '빨간소파'의 두번째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