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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본격 미스터리 스릴러- 스토커

by 스티키 노트
킁킁킁
빼꼼


(제목: 스토커)--아크릴 물감. 스토킹 정황이 보인다. 이 자식아...여...여기 화장실이야...ㅇㄷㄷㄷ


천신만고 끝에 극한의 분리불안은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오리의 스토커 짓은 아직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남편이 화장실에서 문닫고 볼일을 보는데, 그 좁은 문틈으로 놈의 독보적 아우라가 스물스물 뿜어져 들어오더란다. 남편은 그걸 '인공호흡'이라 부르는데, 오리가 밖에서 화장실 문틈에 콧구멍을 대고 마구마구 '격하게' 숨을 불어넣는 행동이다. 뭐지? 나 응급상태야? 지금 나 구조하는 거야? 하아....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오는 기분이었다고.


'망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일정부분 염두에 두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도대체 이 미모의 생명체는 왜 이러는 걸까. 이 개의 매력 어필은 과연 어디가 끝인것일까. 너 우리한테 왜 그러는 건데~ 응? 아직도 보여줄게 더 남아있는거냐? 남편은 결국 일을 보다말고 덜컥 문을 열어준다. 오리가 밖에서 십분이 넘도록 격하게 '인공호흡'을 퍼붓고 있는데, 그러다 늙은 오리에게 과호흡이 올까봐 더럭 겁이 나더란다. 숨소리 하나로 사람을 막 겁박하는 개는 아마 우리 오리가 세계 최초일 것이다. "주인아~ 도대체 언제 끝나? 풀때기를 좀더 왕창 뜯어 먹었어야지. 이게 이렇게 오래걸릴 일이냐고." 이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대사가 아니다. 실제로 이게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더란다. 진단견이었던 것이다. 저 기세등등하게 야리는 눈깔을 보라. 누누히 얘기하지만 보통놈이 아니다.


이럴거였으면 인생이 우리에게 재난문자라도 보냈어야 마땅하다. 아님...미션인가? 잠시 맘편히 볼일 좀 보겠다는데, 이게 그렇게 무리한 바램인 것인가. 우리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자식아~!.


인생이 위기를 만나 휘청거릴때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급히 상담을 청하거나 폭풍검색을 한다. 물론 나도 다 해봤다.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주인을 사랑하여 집착하는 개들의 흔한 행동이라나 뭐라나. 아저씨의 부실한 대장활동을 걱정한 오리의 흔한 구조활동이었던 것이다. 좁은 문틈으로 마구 숨을 몰아 쉰 이유도, 냄새로 주인의 건강상태를 좀더 정확히 가늠해내려던 의도였을지 모른다. 사랑이 이렇게 무서운거다. 아저씨의 과민성 대장이 생성해내는 어질어질한 화장실 스멜도 이 거대한 사랑을 막지 못한다. 사랑따위에 목숨걸지 않는 좀 더 냉철한 강아지가 되어줬으면 했는데....


좀 더럽긴 하지만, 낮에 오리와 둘이 집에 있을때 볼일이 급하면 나는 아예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놓고 볼일을 본다. 그 격렬한 '인공호흡'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오리의 마음이 조급하지 않길 바라서이다. 나라고 이렇게 열렬한 극성팬 앞에서 신비롭게 남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나라고 왜 일말의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한 집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아직도 저렇게 불안을 느끼고 조바심을 치는 모습이 어쩐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오리 나이 벌써 열 다섯살. 고령에도 한결같이 요딴식으로 자기소개를 게을리하지 않는 매력 덩어리 같으니. 너란 강아지. 동물계의 리미티드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다 이렇게 막돼먹은 녀석의 개 수발러가 되어 지금꺼정 줄기차게 개 수발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나도, 그닥 평범한 캐릭터는 못되지 싶다.


우리가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있고 외출했다가도 따박따박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는데, 오리는 여적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불안해 한다. 감시였건 질병 탐지였건, 미모도 출중한 놈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건지.... 이젠 나이도 있으니 좀더 느긋하게 편안해졌으면 좋겠는데, 오리는 영락없는 스토커로 눌러 앉아버렸다. 스트릿 출신이라는 이 뼈아픈 스펙이, 아마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로 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 깊은 상처를 창의적으로 승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집 똥강아지.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하루도 쉬지 않고 주인의 향기로운 개인사마저 모조리 끌어안아버리는 이 무지막지한 스토커를 어찌하면 좋을까. 또 혼자만의 시간을 요만큼도 보장받지 못하고 다 까야하는 이 부끄러움은 과연 누구의 몫이란 말인가.

아저씨를 사랑한 나머지, 스토커가 되어버린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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